사법연수원 20기(1989년 입소)는 ‘88올림픽 기수’로도 불린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유에서다. 연수원 20기는 그해 9월 17일 2차 시험 합격증을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 개회를 선언하던 날이었다. 이들이 어느덧 법률가 인생 30년을 바라보면서 법원과 검찰 조직의 정점을 장악하고 있다. 두 명의 대법관을 배출했고 검찰의 고검장도 여럿이다. 김앤장 등 대형 로펌에서 주요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변호사도 많다.

연수원 20기는 동기애가 끈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도 해마다 두세 차례씩 만난다. 한번 모이면 전체 수료생 300명 가운데 50명 넘게 얼굴을 보인다.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이렇다 할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기 출신인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냉전 시대에 동·서가 함께했던 서울올림픽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대법원장 나올 수도 있는 기수”

20기에는 박정화·김상환 대법관이 있다. 모두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다. 박 대법관은 역대 다섯 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진보성향 판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 보호를 우선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2017년 7월 취임했다. 그의 남편은 대학 선배(고려대)인 박태완 변호사(연수원 33기)다. 남편이 사시에 늦게 합격하면서 상당 기간 생계를 혼자서 책임졌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에 입성한 김상환 대법관은 소탈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재판을 맡아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현 정부가 대법관 지명을 꺼려왔던 ‘서오남(서울대 출신·50대·남성)’이었는데도 문 대통령의 낙점을 받아 관심을 끌었다. 김 대법관의 형은 김준환 국가정보원 3차장이다. 최수환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도 20기다.

법조계 관계자는 “20기는 대법관이 두 명이나 있고 언제든 대법원으로 갈 수 있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도 많아 앞으로 대법원장이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법무부와 검찰에서도 20기는 요직을 맡고 있다. 박정식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과 이금로 수원고등검찰청 검사장, 김오수 법무부 차관 등이 모두 20기다. 법무부 법무실장 출신인 김호철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도 연수원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검찰 안팎에서는 오는 7월 물러나는 문무일 총장의 뒤를 이어 검찰을 이끌어나갈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흘러나온다.

정치권에서는 이종걸·이춘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기다. 이종걸 의원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활동했으며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지냈다.

공직선거 베테랑 화우 윤병철

20기의 활약은 로펌에서도 두드러진다. 로펌업계 부동의 1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20기만 14명이다. 국제중재분야에서 글로벌 전문가로 꼽히는 박은영 변호사나 조세분야 스페셜리스트 백제흠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박 변호사는 한국인 최초로 런던국제중재법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한국 국제중재산업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가 많다.

백 변호사는 건국 이래 최대 조세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 스타가 됐다. 적자를 보던 서울은행이 흑자인 하나은행을 인수하는 역합병 사건으로, 국세청이 법인세 회피 수단이라고 판단해 1조7000억원의 추징금을 부과한 사건이었다. 그는 하나은행을 대리해 과세적부심사 소송에서 역합병이 아니라는 점을 제시해 승소를 이끌어냈다.

조세분야에서는 이인형 광장 변호사도 빼놓기 어렵다. 부장판사를 지낸 이 변호사는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사태 당시 노조가 회사와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국제조세소송에서 리딩케이스를 만들어내고 상속·증여세 소송에서도 다수의 승소 경험이 있다.

박교선 세종 변호사는 제조물 책임 소송의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류회사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일명 ‘술소송’에서 각하 결정을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그는 국내 처음으로 제기된 담배소송을 맡아 피고 측 승소를 이끌기도 했다.

문일봉 율촌 변호사는 금융·건설 관련 기업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부장판사 출신인 윤병철 화우 변호사는 진의장 전 통영시장의 뇌물수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등 공직선거와 관련해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법무법인 바른에는 행정법원 부장판사로 법복을 벗고 행정·부동산 송무에서 이름을 알린 하종대 변호사가 있다.

‘특수통’으로 명성을 쌓았던 전현준 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은 정권 교체 과정인 2017년 인사 태풍에 휩싸여 변호사로 전향했다. 지금은 법무법인 태환에 들어가 형사 소송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 임진석 법무법인 린 대표변호사는 2년 전 변호사 8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변호사 32명(미국 변호사 포함)의 중견 로펌으로 키워냈다.

20기 가운데 일부는 사회적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로 지난 1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구속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검사장)이 20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헌법재판소에서 공보관을 맡았던 배보윤 변호사는 탄핵 결정이 나자 사무실을 차렸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형사 사건 변호인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가 논란이 일자 철회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