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립(立)의 리더십, 파(破)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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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성군인가" 논쟁서 새겨야 할 것
마오쩌둥, 덩샤오핑, 이승만의 고뇌와 선택
우리는 지금 어떤 리더십을 좇고 있는가
이학영 논설실장
마오쩌둥, 덩샤오핑, 이승만의 고뇌와 선택
우리는 지금 어떤 리더십을 좇고 있는가
이학영 논설실장
조선조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불리지만, 흠결도 적지 않았다.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 아버지가 양인이면 어머니가 노비라도 양인으로 인정)을 ‘종모법(從母法)’으로 환원해 노비 숫자를 크게 늘린 것은 대표적인 악업(惡業)으로 꼽힌다. 수령고소금지법이란 법을 제정해 사대부의 전횡에도 발판을 깔아줬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를 통해 ‘세종은 양반에게만 성군이었다’고 비판한 이유다.
세종이 왜 그랬을까. 형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그가 맏형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대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정치적 선택을 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의 재임기간은 건국 초기였던 만큼 왕권 안정이 특히 필요한 시기였다. 세종은 이렇게 다진 통치기반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치에 본격 나섰다.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업을 비롯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전 백성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세종대왕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한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문해력(文解力) 국가로 끌어올린 한글 창시자이며, 과학문물을 장려한 창제(創製)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지도자도 모두에게 박수받는 업적만을 남기진 않는다. 현대 중국사 연구자들이 역대 지도자를 큰 맥락에서 평가하는 방법으로 쓰는 관찰법은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파(破·깨부수다)’와 ‘립(立·세우다)’ 두 기준으로 평생의 업적을 대별(大別)한다.
중국 역사가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을 ‘파(破)의 지도자’로, 덩샤오핑(鄧小平)은 ‘립(立)의 지도자’로 부른다. 마오가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옛 질서를 깨뜨렸고, 덩은 그 토대 위에서 부강한 중국을 세웠다는 관점에서다. 마오는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주도자였다는 점에서도 전형적인 ‘파의 지도자’로 꼽힌다. ‘약진 없는 대약진운동과 문화 없는 문화대혁명’(영국 저널리스트 필립 쇼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마오는 태생부터 파괴와 혁명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마오가 바란 것은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라 가난해도 혁명의 열정이 꿈틀대는 나라였다.”(쇼트, 마오쩌둥 전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마오쩌둥과 달랐다. 똑같은 건국의 지도자였지만 ‘파’가 아닌 ‘립’을 사명으로 새겼다. 한반도를 지배하는 동안 ‘남농북공(南農北工: 남쪽은 농업, 북쪽은 공업 위주)’ 정책을 편 일본이 대한민국 영토에 남긴 산업기반은 극히 빈약했다. 건국 이듬해인 1949년, 정부 재정수입에서 조세가 차지한 비중(재정자립도)이 20%에 불과했을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 없었다. 기댈 건 인재뿐이었다. ‘친일’ 논란을 무릅쓰고 인재 등용 폭을 넓힌 배경이다. 일본인에게서 환수한 기업체 등 귀속재산을 기업경영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불하해 산업화의 불쏘시개로 삼았다. 불가피하게 따라붙을 ‘특혜’ 논란을 꺼렸다면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조치들은 농촌의 소작인에게 자기 농토를 갖게 해준 농지개혁과 함께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고도성장 궤도에 올라설 기틀을 마련했다.
‘립의 리더십’이란 이런 것이다. 가진 것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가 가진 모든 힘을 결집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통합과 비전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파의 리더십’은 그렇지 않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최우선이다. 구성원들의 과거를 파헤치고 내 편과 네 편을 분명하게 선 그어 ‘정의로운 새 출발’을 하는 게 중요하다. ‘확정된’ 과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재단하는 ‘파의 리더십’은 복잡한 셈법이 필요하지 않고 짊어져야 할 리스크도 별로 없다. 그럴듯한 웅변술로 쾌도난마의 ‘정의 실현’을 외쳐대는 것만으로 당대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다.
숱한 리스크를 헤치고 전진해나가야 하는 ‘립의 지도자’는 그 반대다. 당장 속 시원한 정책을 펴지 못하는 데 따른 질시와 반목을 견뎌내야 한다. 온갖 상황변수를 풀어낼 지혜와 과감한 결단의 용기가 필수다. 그 과실은 후대에 축복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리더십을 좇고 있는가.
haky@hankyung.com
세종이 왜 그랬을까. 형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그가 맏형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대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정치적 선택을 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의 재임기간은 건국 초기였던 만큼 왕권 안정이 특히 필요한 시기였다. 세종은 이렇게 다진 통치기반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치에 본격 나섰다.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업을 비롯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전 백성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세종대왕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한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문해력(文解力) 국가로 끌어올린 한글 창시자이며, 과학문물을 장려한 창제(創製)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지도자도 모두에게 박수받는 업적만을 남기진 않는다. 현대 중국사 연구자들이 역대 지도자를 큰 맥락에서 평가하는 방법으로 쓰는 관찰법은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파(破·깨부수다)’와 ‘립(立·세우다)’ 두 기준으로 평생의 업적을 대별(大別)한다.
중국 역사가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을 ‘파(破)의 지도자’로, 덩샤오핑(鄧小平)은 ‘립(立)의 지도자’로 부른다. 마오가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옛 질서를 깨뜨렸고, 덩은 그 토대 위에서 부강한 중국을 세웠다는 관점에서다. 마오는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주도자였다는 점에서도 전형적인 ‘파의 지도자’로 꼽힌다. ‘약진 없는 대약진운동과 문화 없는 문화대혁명’(영국 저널리스트 필립 쇼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마오는 태생부터 파괴와 혁명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마오가 바란 것은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라 가난해도 혁명의 열정이 꿈틀대는 나라였다.”(쇼트, 마오쩌둥 전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마오쩌둥과 달랐다. 똑같은 건국의 지도자였지만 ‘파’가 아닌 ‘립’을 사명으로 새겼다. 한반도를 지배하는 동안 ‘남농북공(南農北工: 남쪽은 농업, 북쪽은 공업 위주)’ 정책을 편 일본이 대한민국 영토에 남긴 산업기반은 극히 빈약했다. 건국 이듬해인 1949년, 정부 재정수입에서 조세가 차지한 비중(재정자립도)이 20%에 불과했을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 없었다. 기댈 건 인재뿐이었다. ‘친일’ 논란을 무릅쓰고 인재 등용 폭을 넓힌 배경이다. 일본인에게서 환수한 기업체 등 귀속재산을 기업경영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불하해 산업화의 불쏘시개로 삼았다. 불가피하게 따라붙을 ‘특혜’ 논란을 꺼렸다면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조치들은 농촌의 소작인에게 자기 농토를 갖게 해준 농지개혁과 함께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고도성장 궤도에 올라설 기틀을 마련했다.
‘립의 리더십’이란 이런 것이다. 가진 것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가 가진 모든 힘을 결집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통합과 비전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파의 리더십’은 그렇지 않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최우선이다. 구성원들의 과거를 파헤치고 내 편과 네 편을 분명하게 선 그어 ‘정의로운 새 출발’을 하는 게 중요하다. ‘확정된’ 과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재단하는 ‘파의 리더십’은 복잡한 셈법이 필요하지 않고 짊어져야 할 리스크도 별로 없다. 그럴듯한 웅변술로 쾌도난마의 ‘정의 실현’을 외쳐대는 것만으로 당대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다.
숱한 리스크를 헤치고 전진해나가야 하는 ‘립의 지도자’는 그 반대다. 당장 속 시원한 정책을 펴지 못하는 데 따른 질시와 반목을 견뎌내야 한다. 온갖 상황변수를 풀어낼 지혜와 과감한 결단의 용기가 필수다. 그 과실은 후대에 축복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리더십을 좇고 있는가.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