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박영선은 홍종학과 다를까
“(중략)이스라엘이 재벌개혁에 나섰다. 혁신적 창업국가로 우뚝 선 이스라엘에서 거대 기업집단이 혁신을 막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같이 작은 나라에서 혁신적 창업을 유도하는 게 규모의 경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홍종학, 혁신경제 4-이스라엘)

재벌개혁만 하면 중소기업들이 벌떡 일어서고 창업이 분출하고 혁신이 쏟아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 눈엔 모든 게 그런 쪽으로만 비치는 모양이다. 홍종학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이스라엘 재벌개혁이라고 말한 2013년 ‘경쟁 촉진과 경제력 집중 축소를 위한 법’은 당시 소수 대기업 집단의 내수 독점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국민의 불만이 터져나온 게 그 배경이 됐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은 그전에 이미 활발했고 글로벌 네트워크로 확장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홍 전 장관은 가공의 인과관계를 사실인 것처럼 갖다 붙였다. 여기에 내수 중심인 이스라엘 대기업 집단과 수출 비중이 높고 연구개발(R&D) 투자를 주도하는 등 혁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 대기업 집단을 동일시하는 오류까지 범했다.

홍 전 장관은 재직 기간에 중소기업들이 재벌이 아니라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 등 정부의 노동정책 때문에 아우성치는 현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는 또 “미국 구글 등은 수많은 벤처를 인수해 성장했는데 한국 대기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국내에서 대기업은 구글처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벤처기업에 투자할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의 자유로운 설립을 막는 금산분리, 계열사를 늘리기 어렵게 하는 대기업 규제 때문이다. ‘기·승·전·재벌개혁’이 낳은 자승자박이다. 결국 그는 중소·벤처기업인들에게 실망만 안긴 채 떠났다.

‘기·승·전·재벌개혁’의 계보로 치면 박영선 현 중기부 장관은 홍 전 장관보다 훨씬 위에 있다. 그런 박 장관이 《수축사회》(저자 홍성국)를 거론하며 상생과 공존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책 곳곳에서 수축사회를 돌파하기 위해 제시한 처방 중엔 재벌개혁론자들의 대기업·중소기업에 대한 시각 변화를 촉구하는 게 적지 않다.

“한국 중소기업은 작아도 너무 작다.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중소기업을 키워야 한다.”(327~328쪽) “정책금융으로 연명하는 좀비 중소기업은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330쪽) “은행 등 금융기관에 주인이 있어야 벤처 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 금융이 기업의 생성부터 퇴출까지 책임지는 구조로 가야 한다.”(331~332쪽) “대기업이 벤처기업 인수 경쟁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의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342~343쪽)

낡아빠진 사고, 구태의연한 정부 지원과 규제의 틀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주문으로 들린다. “모두가 성장을 원하지만 아무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얼마 전 방한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로머가 학생들에게 자주 한다는 말이다. 경제를 공급과 수요의 법칙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믿을 건 대기업이든 중소·벤처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예측 불가능한 ‘기업가의 자유의지’뿐이다. 지금이 4차 산업혁명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박 장관은 홍 전 장관과 함께 이스라엘의 재벌개혁에 주목해야 한다고 합창했던 정치인이다. 미안하지만 이스라엘을 ‘스타트업 천국’ ‘창업 국가’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의 자서전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 어디에도 재벌개혁 얘기 따위는 없다. 대신 페레스 전 대통령은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옛날에 다비드 벤구리온(초대 총리)은 ‘이스라엘에서 현실주의자가 되려면 기적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인간의 창의성이 그렇게 위대한 성취를 이뤄냈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