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산업이 다시는 좋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희망이 있다면 기업인들이 애써 일군 회사를 팔려고 생각하겠습니까.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살아보려고 했지 포기하려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산에서 용접전문기업을 운영하는 최기갑 한토 사장의 하소연이다.

▶본지 4월 22일자 A1, 5면 참조

‘흔들리는 뿌리산업’ 기획기사 취재과정에서 만난 뿌리기업 사장들에게선 공통적으로 무력감이 느껴졌다. 뿌리기업이 얼마나 어렵냐고 물으면 “몇 년째 어렵다는 얘기를 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고 했고, 어떤 지원책이 필요하겠느냐고 물으면 “수도 없이 같은 얘기를 반복했지만 변한 게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뿌리산업은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6개 업종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자동차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은 이들 뿌리기업의 가공·공정작업 없이는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뿌리산업을 중국 등 후발주자가 넘볼 수 없는 ‘마지막 기술 프리미엄’ 영역으로 꼽는 이유다.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할 때 뿌리기업의 공정이 필요한 부품은 전체의 90%, 무게기준으론 86%를 차지한다.

뿌리산업의 위기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조선 자동차 등 전방산업의 장기 침체에다 젊은 층의 구인난까지 겹쳐 앞이 보이지 않는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엔 더 힘들어졌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로제 본격 시행 등의 영향으로 회사 매출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중이 치솟고 있어서다.

반월산업단지에서 유일금속을 운영하는 설필수 사장은 “회사가 주거와 생활을 지원해야 하는 외국인 근로자도 최저임금을 똑같이 적용받다 보니 인건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했다.

뿌리기업들은 정책당국의 산업 현장이해도가 떨어진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대표적인 게 주 52시간 근로제다. 하청과 재하청을 받는 뿌리기업들은 52시간 근로로는 손익분기점(BEP)을 맞추기 힘들다. 원청 기업들의 불황으로 일감은 줄어들고 있는 데다 수년째 납품단가는 ‘꿈쩍’하지 않고 있어서다.

부천시 오정산업단지 내 금형업체의 한 사장은 “매출 상위 10% 기업들마저 3년 연속 적자를 냈다면 말 다한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도금업체 사장은 “뿌리기업 사장들 사이에 ‘낮에 공장을 돌려 인건비를 내고, 밤에 공장을 돌려 전기료와 임대료를 내면 남는 게 없다’는 자조 섞인 말이 오간다”며 “일감이 있을 때 공장을 오래 돌려야 겨우 수익이 나는데 일을 덜 하라고만 하니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2013년 ‘뿌리산업 진흥과 첨단화에 관한 법률’을 제정, 뿌리산업 지원에 나섰다. 기술 개발과 인력 채용을 주 내용으로 한 정부 지원책은 업계 현실과 동떨어진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최저임금 차등화, 납품단가 현실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적용 유예 등 정작 뿌리기업들이 ‘가려운 곳’은 ‘나 몰라라’ 한다는 게 업계의 불만이다. 당장 내년 시행되는 화관법에 따라 공장설비를 바꿔야 하는 규제만 수백 개가 새로 생긴다. 박평재 부산녹산도금조합 이사장은 “뿌리기업 사장들은 환경부 기준에 맞춰 공장을 새로 지어야 할지, 이참에 문을 닫아야 할지를 놓고 대부분 속이 타들어간다”고 전했다.

“같은 얘기를 반복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는 현장의 ‘뿌리 깊은’ 좌절감에 이제 정책당국이 답을 줘야 한다.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