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수출주도성장 vs 소득주도성장
구석기 시대에도 ‘세대 차이’라는 말이 있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주 옛날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차별화 전략이다. 그러면서 역사를 단순화한다. 심지어 왜곡한다.

터무니없이 왜곡당하는 대표적인 시대가 ‘한강의 기적’을 일군 1960년대와 1970년대다. 수출 일변도의 경제개발, 정경유착 시대로 ‘프레임’당한다. 극심했던 민생고 해결, 적절한 분배에 대한 고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고민을 했는데도 말이다.

‘수출주도성장’을 밀어붙였다는 평가를 받는 박정희 정부 초기를 들여다보자. 당시 정부는 수출주도형 경제개발로 출발한 게 아니었다. 1962년 시작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은 수입대체형 공업화였다. 정부는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 화폐개혁까지 단행했다. 기대와 달리 금융시장의 혼란만 커졌고 외환보유액은 계속 줄었다. 1963년 9월에는 1억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최초의 외환위기였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쪽에서 물꼬가 터졌다. 의류 신발 핸드백 등이 해외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이 중화학공업으로 옮겨타면서 경공업 부문에서 생긴 틈새시장이었다. 때마침 국내 기업인과 재일 동포 기업인들이 수출 위주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다. ‘찢어지게’는 춘궁기(春窮期)인 보릿고개 때 풀뿌리와 나무껍질까지 먹다 보니 뱃속 대변이 딱딱해져 용변을 볼 때 항문이 찢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만큼 민생(民生)이 고달팠다. 내수와 수출의 구분이 있었겠나. 필요한 곡식을 사들이는 데 달러가 절실히 필요했고,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이게 훗날 ‘수출주도성장 모델’이 됐다.

‘정경유착’ 딱지가 붙은 1970년대도 마찬가지다. 당시 정부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옮겨타기’가 고민이었다. 수출 경쟁력을 갖추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공장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정부는 기업 육성책으로 ①직접보호 ②중점지원 ③자립발전 ④완전국제경쟁 ⑤세계일류화의 5단계 방안을 마련했다. ①~②단계에서는 정부가 기업에 각종 지원책을 몰아주고, ③단계에서는 민간이 주도하도록 유도하고, ④~⑤단계에서는 시장을 개방해 경쟁체제로 간다는 전략이었다. 전자 조선 석유화학 철강 기계 비철금속 등 6개 업종에서 한두 개 기업을 선정해 집중 지원했다.

정경유착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는 “비난받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독점을 허용해 하루 속히 국제 규모화하고, 곧이어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단계적 정책을 써야 한다”(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며 밀어붙였다. 한국이 지금의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춘 것은 당시 정부가 ‘정경유착의 굴레’를 짊어진 덕분이다.

대신 대기업 주식을 골고루 분산하는 정책을 폈다. 1972년 제정된 기업공개촉진법이다. 1980년대 주식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분배에 대한 당시 정부의 깊은 고민이 선사한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중산층이 크게 늘어나면서 분배가 개선됐다.

그때로부터 30년 넘게 흘렀다. 다음달 10일이면 만 2년이 되는 문재인 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였다. 최저임금을 30% 가까이 올렸고, 주 52시간 근로제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단행했다.

지금까지 성과는 별로 좋지 않다. 수출과 투자가 부진하다. 한국은행이 최근 1년 사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네 차례나 떨어뜨려 2.5%로 하향 조정했을 만큼 경기가 나쁘다. 고용도 살아나지 않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집권한 정부가 국민에게 새 이념과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배를 중시하는 소득주도성장 이론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념을 토대로 만든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경제는 실험실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에 매달리다 진짜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놓칠지 모른다.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