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아직도 '타는 목마름으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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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민족·민주'란 뉴트로 부활
'민주' 팔면서 反 민주 행태 극심
진정한 민주는 권력제한과 법치로
오형규 논설위원
'민주' 팔면서 反 민주 행태 극심
진정한 민주는 권력제한과 법치로
오형규 논설위원
참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캠퍼스에 꽃이 만발해도 보지 못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외칠 용기가 없음을 부끄러워했다. 주입식 강독과 토론으로 좌경 세례식을 치르고, 거리로 공단으로 달려갔다. 강의실보다는 막걸리주점이 더 익숙했고, 최루가스와 땀에 범벅인 채 젓가락을 두드리며 운동가를 불렀다.
민주(民主)에 대한 갈증에 늘 목이 말랐다. 김지하의 시구대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다. 민주주의가 모두의 전부인 줄 알았다. 586세대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20대가 50대가 됐고, 이젠 아들딸이 20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입증된 사실은 ‘민주화=민주주의’가 아니란 점이다.
그런 1980년대를 관통한 ‘민족·민주’라는 이념이 21세기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뉴트로(새로운 복고)로 되살아났다. 민주는 허다한 단체들의 ‘간판’과 ‘완장’으로, 민족은 ‘관제(官製) 민족주의’로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지향점이 과연 한국인을 위한 것인지, ‘민주’라는 간판을 단 단체들은 과연 민주적인지 잘 모르겠다.
‘민주’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반(反)민주적 행태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 사이에서 드러난 미투, 서열, 선민의식은 왕조시대 신분사회를 연상시킨다. 성적 소수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까지 포용하면서 왜 생각의 다양성에 대해선 그토록 폭력적이고 인색한가. 언론의 본령은 권력 감시인데 정권 비판이 왜 시빗거리가 되고, 지상파 방송에선 권력 비판을 찾기 힘든지 잘 모르겠다.
누구나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잘 안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뤄지는 제도’다. 그 요체는 국가권력의 제한·견제, 예외없는 법치, 자유에 상응하는 책임에 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진국들의 공통된 역사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30여 년간 대한민국은 과연 그런 나라였나. 정권을 거듭할수록 정부는 커지고, 국가는 개인의 삶에 더 많이 간섭하고, 정치는 국민을 벌 주는 입법을 쏟아냈다. 미국 경제학자 한스헤르만 호페가 “모든 정부는 자신을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고, 민주정 아래서 정부의 재산권 침해는 합법적이기에 지속적”(《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이라고 지적한 대로다.
지난해 21.2%로 역대 최고인 조세부담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 복지지출이 OECD 평균(GDP의 21%)의 절반 수준인데 조세부담률은 OECD 평균(2016년 24.9%)에 근접해 가는 것은 정부가 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방증이다. 어느 선진국이 한국처럼 정부가 만사를 육성·지원·개입하는지 모르겠다. 사법부 불신도 불신이지만 법치의 형해화는 더 심각하다. “법 앞에 예외없다”는 엄포와는 달리, 노동권력은 거의 치외법권 수준이 아닌가.
역사의 진실은 민주주의가 과정이자 절차이지 종착역은 아니란 점이다. 프랑스혁명(1789)은 왕정을 타도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근 한세기 동안 대혼란의 시작이었다. 모두가 외치고 갈망한다고 민주주의가 오는 게 아니다. 개개인에게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체화될 때라야 비로소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내 소신이 옳고 중요하다고 믿는 만큼, 다른 이들의 견해도 중요하고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다.
그러려면 기회가 균등한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과정이 공정한 게 아니라 절차대로여야 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시인 서효인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관해 이런 감상을 남겼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ohk@hankyung.com
민주(民主)에 대한 갈증에 늘 목이 말랐다. 김지하의 시구대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다. 민주주의가 모두의 전부인 줄 알았다. 586세대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20대가 50대가 됐고, 이젠 아들딸이 20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입증된 사실은 ‘민주화=민주주의’가 아니란 점이다.
그런 1980년대를 관통한 ‘민족·민주’라는 이념이 21세기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뉴트로(새로운 복고)로 되살아났다. 민주는 허다한 단체들의 ‘간판’과 ‘완장’으로, 민족은 ‘관제(官製) 민족주의’로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지향점이 과연 한국인을 위한 것인지, ‘민주’라는 간판을 단 단체들은 과연 민주적인지 잘 모르겠다.
‘민주’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반(反)민주적 행태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 사이에서 드러난 미투, 서열, 선민의식은 왕조시대 신분사회를 연상시킨다. 성적 소수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까지 포용하면서 왜 생각의 다양성에 대해선 그토록 폭력적이고 인색한가. 언론의 본령은 권력 감시인데 정권 비판이 왜 시빗거리가 되고, 지상파 방송에선 권력 비판을 찾기 힘든지 잘 모르겠다.
누구나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잘 안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뤄지는 제도’다. 그 요체는 국가권력의 제한·견제, 예외없는 법치, 자유에 상응하는 책임에 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진국들의 공통된 역사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30여 년간 대한민국은 과연 그런 나라였나. 정권을 거듭할수록 정부는 커지고, 국가는 개인의 삶에 더 많이 간섭하고, 정치는 국민을 벌 주는 입법을 쏟아냈다. 미국 경제학자 한스헤르만 호페가 “모든 정부는 자신을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고, 민주정 아래서 정부의 재산권 침해는 합법적이기에 지속적”(《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이라고 지적한 대로다.
지난해 21.2%로 역대 최고인 조세부담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 복지지출이 OECD 평균(GDP의 21%)의 절반 수준인데 조세부담률은 OECD 평균(2016년 24.9%)에 근접해 가는 것은 정부가 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방증이다. 어느 선진국이 한국처럼 정부가 만사를 육성·지원·개입하는지 모르겠다. 사법부 불신도 불신이지만 법치의 형해화는 더 심각하다. “법 앞에 예외없다”는 엄포와는 달리, 노동권력은 거의 치외법권 수준이 아닌가.
역사의 진실은 민주주의가 과정이자 절차이지 종착역은 아니란 점이다. 프랑스혁명(1789)은 왕정을 타도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근 한세기 동안 대혼란의 시작이었다. 모두가 외치고 갈망한다고 민주주의가 오는 게 아니다. 개개인에게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체화될 때라야 비로소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내 소신이 옳고 중요하다고 믿는 만큼, 다른 이들의 견해도 중요하고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경청하는 태도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다.
그러려면 기회가 균등한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과정이 공정한 게 아니라 절차대로여야 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시인 서효인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관해 이런 감상을 남겼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