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을 발사하는 ‘입사기’와 가속터널 구성품인 ‘초전도 가속모듈’ 을 이어붙여 시험하는 모습.  IBS 제공
▶이온을 발사하는 ‘입사기’와 가속터널 구성품인 ‘초전도 가속모듈’ 을 이어붙여 시험하는 모습. IBS 제공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는 모두 118개다. 1번 수소(H)에서 118번 오가네손(Og)까지다.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150년 전 원소주기율표를 내놓을 때는 63개였지만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점점 많아졌다.

중성자 수가 다른 원소(동위원소)는 3000여 개로 추정된다. 수소, 중수소, 삼중수소 등이다. 그런데 동위원소는 만들기 어렵고, 겨우 만들어도 금방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희귀한’ 동위원소를 활용하면 세상에 없던 신소재를 개발하거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내는 장치를 중이온가속기라고 한다. 우주 생성물질도 중이온가속기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대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심장’인 중이온가속기 장치 구축이 본격화됐다. 권면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 건설구축사업단장은 26일 “초전도 가속모듈을 설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며 “2022년 가속기 가동이 목표”라고 말했다.

중이온가속기는 이온(전자를 얻거나 잃어 전기적 성질을 띤 입자)을 빛의 속도로 날려 벽에 부딪혀 깨뜨린 뒤 세상에 없던 입자(원소)를 만들어낸다. ‘미지의 입자 생산공장’인 이 시설 이름은 라온(RAON)이다.

라온은 희귀동위원소가속복합시설(Rare isotope Accelerator complex ONline experiment)의 머리글자를 땄다. 중이온가속기는 관련 연구성과가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노벨상의 산실’로도 불린다.
'희귀 원소' 만드는 중이온가속기…난치병 해결하고, 노벨상 안겨줄까
팔방미인 가속기 라온

라온이 완공되면 국내에서 ‘가속기 3형제’가 활약하게 된다. 2017년 가동을 시작한 포항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광속(빛의 속도)으로 가속한다. 이때 전자가 흔들리며 방출하는 빛, 즉 ‘방사광’을 활용해 연구한다.

이 방사광은 파장이 0.1~6나노미터(㎚)로 짧다. 충돌에너지는 10기가전자볼트(GeV)에 달한다. 단백질 등 분자 수준 물질을 현미경처럼 보는 게 가능하다. 방사광가속기를 이용해 스웨덴 스톡홀름대 연구팀이 물 분자구조를 새로 밝힌 연구 결과가 지난해 말 사이언스지에 실렸다. 가속기 길이만 1.1㎞에 달한다.

경주 양성자가속기는 수소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낸 양성자를 광속의 0.3배로 가속해 충돌시킨다. 이 가속기는 물성 연구, 신소재 발견이 주 임무다. 노랑·파랑·초록 다이아몬드를 제조한 게 대표적이다.

다이아몬드 주성분인 탄소에 양성자를 충돌시키면 미세한 구멍이 생기는데, 여기로 특정 파장의 빛이 잘 흡수되면서 가지각색의 다이아몬드가 탄생한 것이다. 라온은 방사광가속기와 양성자가속기의 장점을 합쳤다. 자연에 존재하는 원자핵 중 가장 무거운 것이 우라늄인데, 라온은 우라늄까지 가속이 가능하다.

세계 최초·최대 규모 선형 가속기

라온 가속 원리는 사실 간단하다. 원자핵은 양성자, 중성자로 구성돼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돈다. 전자를 잃거나 얻으면 이온이 된다. 양쪽 끝이 양극, 음극인 원통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이온(양 또는 음)을 넣으면 반대되는 극으로 이동한다. 이 통을 거대하게 만들고 이동속도를 광속으로 끌어올렸다고 보면 된다. 광속으로 날아간 이온은 부딪혀 파괴된 뒤 무한한 동위원소를 만들어낸다.

가속기를 이용한 희귀동위원소 생성 방법은 두 가지다. 가벼운 원소를 두꺼운 표적에 충돌(ISOL) 또는 무거운 원소를 가벼운 표적에 충돌(IF)시키는 방식이다. 장단점은 정반대다. ISOL 방식은 순도가 높은 동위원소를 생성할 수 있는 반면 종류가 제한적이다. IF 방식은 순도는 떨어지지만 생성가능 원소 종류가 다양하다. 라온은 세계 최초로 두 방식을 모두 적용한 중이온가속기가 된다. 세계 각국의 가속기는 두 방식 중 하나만으로 가동하고 있다.

라온은 또 중이온 가속 선형 가속기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다. 부지 면적은 95만2000여㎡로 축구장 130배에 달한다. 가속기 총 길이는 약 800m다. 104개 초전도가속모듈을 포함해 총 340여 개 가속장치를 붙인 터널을 지나면서 중이온이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초전도 상태를 위해 영하 273도의 극저온을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시설 구축도 관건이다. 가속기는 7m 두께 콘크리트 터널에 둘러싸여 지하 13m에 묻힌다. 방사선을 차폐하기 위해서다. 라온 구축엔 2011년부터 총 1조4875억원을 투입했다. 장치구축비 5028억원, 공사비 6276억원, 부지매입비 3571억원 등이다. 포스코건설 태영건설 등이 짓고 있다.

노벨상 수상의 산실 가속기

가속기를 통해 노벨상으로 이어진 사례만 30여 개다. 가깝게는 201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거대강입자가속기(LHC)로 발견한 ‘힉스’ 입자가 대표적이다. 1964년 힉스입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제시한 영국 물리학자 피터 힉스는 201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88년 노벨물리학상 주제인 ‘뮤온’ 입자도 미국 브룩헤이븐국립연구소(BNL)의 가속기 AGS에서 만들어졌다. 뮤온 빔은 고해상도 비파괴검사의 핵심 물질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언 레더먼 미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장은 1962년 뮤온 가설을 처음 내놨다. 우주의 본질을 파헤치는 연구가 20~30년 시차를 두고 가속기를 통해 입증되는 셈이다. 2009년 노벨화학상 주제인 ‘리보솜의 3차원 구조 규명’도 미 BNL의 또 다른 가속기 ‘NSLS’에서 비롯됐다.

IBS는 라온을 가동해 새로운 원소, 가칭 ‘코리아늄’을 개발해 첫 노벨상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문미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은 지난 24일 IBS를 방문해 “국가 과학기술 혁신을 위해 가속기의 적극적인 활용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