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료 짭짤한 '고위험 펀드' 권하는 판매社…장기주식형 펀드는 '홀대'
“장기 투자 상품은 회전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받는 게 현실입니다.”

A자산운용사 대표의 말은 주식형 공모펀드가 처한 상황을 대변해준다. 말로만 장기 투자를 외칠 뿐 정작 은행과 증권회사 창구에선 장기 주식형 펀드가 홀대받고 있다는 얘기다. 수수료 수익이 짭짤한 고위험 단기 투자 상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29일 한국거래소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은행과 증권사가 판매하는 펀드 중 고위험 상품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초고위험 상품으로 분류되는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대표적이다. 전체 펀드 판매의 60%를 차지하는 은행들은 지난해에만 9조6683억원어치의 ETF 신탁 상품을 팔았다. 사상 최대 규모다.

이 중 레버리지 ETF가 4조4966억원어치로 절반에 달한다. 레버리지 ETF는 지수 상승폭의 두 배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지수가 하락하면 손실도 두 배로 커지는 초고위험 상품이다. 대표 상품인 ‘KODEX 코스닥150 레버리지’는 작년 41.3%의 손실을 봤다.

은행들이 ETF 판매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회전율이 높아 수수료 수익이 짭짤하기 때문이다. 중장기로 투자할 만한 적립식 주식펀드는 회전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있다.

골치 아픈 장기 상품은 뒷전

대한민국 펀드시장의 현실이다. 소득과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단타와 고위험 상품에 몰리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조사에 따르면 국내 펀드 투자자의 절반 이상(52.2%)은 투자 기간이 ‘2년 미만’이다. 10년 이상을 바라보고 펀드에 가입하는 선진국 투자자와 다르다. 김태우 KTB자산운용 사장은 “주식이든 펀드든 단타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며 “매매 횟수를 거듭할수록 수수료 부담만 늘어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국내 투자자의 펀드 투자 기간이 짧은 데에는 은행, 증권사 등 판매사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수료를 더 많이 받기 위해 회전율을 높일 수 있는 ETF 신탁, 주가연계증권(ELS) 등 단기 상품 위주로 판매 경쟁을 벌인 결과다. 판매사들은 조금만 수익이 오르면 펀드를 갈아타라며 환매를 추천한다. 레버리지 ETF는 1주일 만에 환매를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 중장기 투자로 목돈을 불릴 수 있는 공모펀드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펀드가 손실을 내도 운용사와 판매사는 수수료로 배를 불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펀드시장은 상품 출시와 운용을 맡는 자산운용사와 펀드를 판매하는 은행, 증권사 등 판매사로 역할이 구분돼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펀드는 은행에서 58.7%, 증권사에서 38.5%가 판매된다. 양쪽에서 판매되는 비중이 97%를 넘는다.

고객보다는 판매사 눈치보는 운용사

펀드업계에서 은행, 증권사 등 판매사는 ‘갑(甲)’이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개발해도 판매사가 팔아주지 않으면 ‘을(乙)’인 자산운용사는 속수무책이다. 삼성자산운용, KB자산운용, 신한BNP자산운용 등 대형 운용사도 계열사 은행, 증권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대표는 “블랙록, 피델리티 등 해외 유명 자산운용사는 원하는 조건에 상품을 팔아주지 않으면 판매를 중단하기도 한다”며 “국내 운용사는 판매사 눈치를 보기 때문에 투자자에게 좋은 상품보다는 은행, 증권사가 만족할 만한 상품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다른 중소형 운용사 사장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월지급식 공모펀드를 몇 년 전 설계했다가 받아주겠다는 판매사가 없어 취소한 적이 있다”며 “판매사는 상품 회전율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장기투자 상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펀드 수익이 나지 않으면 수수료를 받지 않는 ‘성과보수펀드’와 ‘여러 개 헤지펀드에 분산투자하는 ‘사모재간접펀드’의 성과가 지지부진한 것도 관리 부담을 떠안기 싫은 판매사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원인으로 꼽힌다.

꼭지에서 권유하는 판매사 직원

판매사 직원들이 펀드에 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헤지펀드 대표는 “상품 구조를 정확하게 알고 고객 성향에 맞게 펀드를 추천해야 하는데 최근 수익률만 보여주고 상품을 권유하는 게 다반사”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불완전판매’로 인한 민원도 증가 추세다.

제대로 된 분석 없이 수익률만 보고 펀드를 추천하다 보니 ‘꼭지’에서 펀드를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판매사 직원이 추천하는 펀드에 덜컥 가입했다가 손실을 본 뒤 펀드 자체를 기피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변동성이 심한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신흥국 주식형 펀드를 고점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본 투자자가 많다.

같은 금융계열사 펀드를 우선 판매하는 ‘밀어주기’ 관행도 여전하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은행에서 판매된 펀드의 24.3%가 같은 계열사 펀드였다. 증권사는 이 비율이 36.8%로 더 높았다.

계열사 펀드는 성과도 부진하다. 김종민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7년 말까지 국내 주식형 공모펀드의 성과를 분석한 결과 판매사의 계열사 펀드는 비계열사 펀드보다 벤치마크(비교 대상 지수) 대비 초과수익률이 판매 이후 3년간 연평균 19~35bp(1bp=0.01%포인트)가량 낮은 것으로 추산됐다. 김 연구원은 “공모펀드에 대한 투자자 신뢰를 회복하려면 중장기 수익률을 높이려는 운용업계의 노력과 함께 판매사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금융당국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