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은 대법원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적용하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잇따라 기업 패소 판결을 내리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지난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아니라 소부(小部)에서 “‘경영상 어려움’에 대해서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요건을 추가한 점도 논란거리다. 법원이 정부와 노동계를 의식한 ‘코드 판결’을 내놓고 있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온다.

대법원은 2월 14일 ‘시영운수 사건’에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고 원고(소송 제기 근로자) 승소로 판결했다. 인천 버스회사인 시영운수 근로자들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고, 그동안 못 받은 수당을 지급하라고 낸 소송이었다. 1심과 2심은 시영운수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산입해 임금을 더 달라는 청구는 신의칙에 위배된다”며 근로자들의 추가 임금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영운수 사건이 주목받은 이유는 대법원이 당초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판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법원조직법은 기존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원합의체 사건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전원이, 일반 사건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가 판결한다.

대법원은 2013년 12월 ‘갑을오토텍 사건’을 전원합의체에서 판결했다. 당시 통상임금의 요건인 ‘정기성·일률성·고정성’과 소급 청구를 제한하는 법리인 신의칙을 제시했다. 이후 신의칙 적용을 놓고 하급심 판결이 엇갈리면서 혼란이 지속되자 대법원은 2015년 10월 시영운수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기업들은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는 재무 항목과 판단 시점, 경영상의 어려움을 평가하는 근거 등을 명확히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해 말 시영운수 사건을 다시 소부로 보냈다. ‘판례를 더 쌓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영운수 사건을 맡은 소부는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신의칙을 적용하는 여건인 경영상 어려움은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3년 전원합의체 결정을 바꾸려면 다시 전원합의체를 구성해야 하는데도 소부가 새로운 법리를 제시한 것은 중대한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