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사십둘'은 어색한 수 읽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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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17)
일상의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수 읽기가 하나 있다.
숫자를 "사십둘" 식으로 말하는 게 그것이다. '마흔둘'도 아니고
'사십이'도 아니다. 나이를 말할 때도 '사십두 살'이라고 한다.
'마흔두 살' 또는 '42세'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일상의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수 읽기가 하나 있다.
숫자를 "사십둘" 식으로 말하는 게 그것이다. '마흔둘'도 아니고
'사십이'도 아니다. 나이를 말할 때도 '사십두 살'이라고 한다.
'마흔두 살' 또는 '42세'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일상의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수 읽기가 하나 있다. 숫자를 “사십둘” 식으로 말하는 게 그것이다. ‘마흔둘’도 아니고 ‘사십이’도 아니다. 의외로 이런 경우가 흔하다. 나이를 말할 때도 ‘사십두 살’이라고 한다. ‘마흔두 살’ 또는 ‘42세’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10 이하 숫자는 고유어로 많이 읽어
말 쓰임새의 이런 차이는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숫자를 익힌, 지난 시절의 학습경험 때문인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되면서 한국인은 숫자 읽기에 처음 눈을 떴다. 당시 문자보급교재와 신문을 보면 지금의 수 읽기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①달걀 일곱 개 중에서 세 개가 깨졌으니 남은 것이 몇 개인가.(조선일보 <문자보급교재>, 1936년) ②시계가 네 시 치오.(동아일보 <한글공부>, 1933년) ③제일 회 성적으로 보면 연령으로는 일곱 살부터 사십구 세까지 있고…(조선일보 1929년 10월 4일자)
10까지의 수에는 고유어 하나, 둘, 셋 등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10을 넘는 수는 한자어가 우세했다. 예문의 ‘세 개’ ‘네 시’ ‘일곱 살’과 ‘사십구 세’에서 이런 구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0 이하 숫자에서 고유어 수사의 쓰임새가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계를 볼 때 ‘두 시 삼십 분’ 식으로 고유어 수사와 한자어 수사가 따로 자리잡은 배경도 유추할 만하다. 12시까지인 시 개념은 고유어로, 60까지인 분/초 개념은 자연스레 한자어 수사로 읽었을 것이다.
수 읽기에서 이 같은 경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1명, 2명이라 쓰고 이를 일 명, 이 명으로 읽기보다 한 명, 두 명으로 읽는 게 더 보편적이다. ‘한순간’과 ‘일순간’은 같은 말인데, 고유어 수사가 결합한 한순간이 더 널리 쓰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사십둘’ 같은 이상한 수 읽기 역시 그런 경향의 흔적이다. 이십, 삼십, 사십…으로 읽다가 끄트머리에 있는 단자리는 다시 고유어로 읽은 것이다.
‘1도 없다’에는 ‘하나’와 ‘일’의 갈등 담겨
최근 들어 널리 쓰이는 말 ‘1도 모른다’도 그런 점에서 깊이 들여다볼 만하다. 이 말이 단기간에 강력한 유행을 타게 된 배경에는 숫자 읽기에 대한 역사적 갈등과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아닐까?
본래 ‘하나도 모른다’고 할 때의 ‘하나’는 ‘전혀, 조금도’란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 단순히 수의 개념을 넘어선 표현이다. 그럼에도 ‘하나’와 ‘일’의 기표상 틈을 이용해 ‘언어적 긴장감’을 유발했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한자어 수사 ‘일’과 고유어 수사 ‘하나’가 혼재돼 오면서 세력 다툼을 벌여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사학적으로는 ‘하나’를 ‘일(1)’로 대체함으로써 우리 인식 저변에 깔린, ‘숫자 읽기’에 대한 갈등의 단초를 건드린 셈이다. 애초 의도한 것은 아닐지언정, 기존의 말을 비틀어 씀으로써 규범어의 진부함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1도 모른다’는 우리말이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진화함을 보여주는 ‘즐거운 일탈’이라 할 만하다. 관점에 따라 국어 파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용광로 같은 ‘언어의 시장’ 안에서 벼려지고 단단해진 말이 많을수록 우리말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글쓰기에서 상투어 등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표현을 가급적 배제하는 이유도 같다. 언어의 ‘틀지움’에 생각을 가둘 때 더 이상 창의성을 기대할 수 없다. 언어가 살아있는 유기체란 것은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다.
10 이하 숫자는 고유어로 많이 읽어
말 쓰임새의 이런 차이는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숫자를 익힌, 지난 시절의 학습경험 때문인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되면서 한국인은 숫자 읽기에 처음 눈을 떴다. 당시 문자보급교재와 신문을 보면 지금의 수 읽기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①달걀 일곱 개 중에서 세 개가 깨졌으니 남은 것이 몇 개인가.(조선일보 <문자보급교재>, 1936년) ②시계가 네 시 치오.(동아일보 <한글공부>, 1933년) ③제일 회 성적으로 보면 연령으로는 일곱 살부터 사십구 세까지 있고…(조선일보 1929년 10월 4일자)
10까지의 수에는 고유어 하나, 둘, 셋 등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10을 넘는 수는 한자어가 우세했다. 예문의 ‘세 개’ ‘네 시’ ‘일곱 살’과 ‘사십구 세’에서 이런 구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0 이하 숫자에서 고유어 수사의 쓰임새가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계를 볼 때 ‘두 시 삼십 분’ 식으로 고유어 수사와 한자어 수사가 따로 자리잡은 배경도 유추할 만하다. 12시까지인 시 개념은 고유어로, 60까지인 분/초 개념은 자연스레 한자어 수사로 읽었을 것이다.
수 읽기에서 이 같은 경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1명, 2명이라 쓰고 이를 일 명, 이 명으로 읽기보다 한 명, 두 명으로 읽는 게 더 보편적이다. ‘한순간’과 ‘일순간’은 같은 말인데, 고유어 수사가 결합한 한순간이 더 널리 쓰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사십둘’ 같은 이상한 수 읽기 역시 그런 경향의 흔적이다. 이십, 삼십, 사십…으로 읽다가 끄트머리에 있는 단자리는 다시 고유어로 읽은 것이다.
‘1도 없다’에는 ‘하나’와 ‘일’의 갈등 담겨
최근 들어 널리 쓰이는 말 ‘1도 모른다’도 그런 점에서 깊이 들여다볼 만하다. 이 말이 단기간에 강력한 유행을 타게 된 배경에는 숫자 읽기에 대한 역사적 갈등과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아닐까?
본래 ‘하나도 모른다’고 할 때의 ‘하나’는 ‘전혀, 조금도’란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 단순히 수의 개념을 넘어선 표현이다. 그럼에도 ‘하나’와 ‘일’의 기표상 틈을 이용해 ‘언어적 긴장감’을 유발했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한자어 수사 ‘일’과 고유어 수사 ‘하나’가 혼재돼 오면서 세력 다툼을 벌여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사학적으로는 ‘하나’를 ‘일(1)’로 대체함으로써 우리 인식 저변에 깔린, ‘숫자 읽기’에 대한 갈등의 단초를 건드린 셈이다. 애초 의도한 것은 아닐지언정, 기존의 말을 비틀어 씀으로써 규범어의 진부함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1도 모른다’는 우리말이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진화함을 보여주는 ‘즐거운 일탈’이라 할 만하다. 관점에 따라 국어 파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용광로 같은 ‘언어의 시장’ 안에서 벼려지고 단단해진 말이 많을수록 우리말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글쓰기에서 상투어 등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표현을 가급적 배제하는 이유도 같다. 언어의 ‘틀지움’에 생각을 가둘 때 더 이상 창의성을 기대할 수 없다. 언어가 살아있는 유기체란 것은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