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파행에도 법안 발의 폭주…'총선용 스펙쌓기' 분주한 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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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들어 2121건 발의
19대 국회 동기대비 44% 급증
숫자만 바꿔 건수 늘리기 '꼼수'
내년 '총선 공천' 실적 만들기
19대 국회 동기대비 44% 급증
숫자만 바꿔 건수 늘리기 '꼼수'
내년 '총선 공천' 실적 만들기
이철규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1일 하루 동안 13건의 법안을 쏟아냈다. 신탁법 개정안, 밀항단속법 개정안 등 다양했다. 하지만 법안 취지는 “벌금형 기준을 징역 1년당 1000만원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며 각 법안에 담긴 벌금 한도를 높이는 같은 내용이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숫자만 바꾸는 ‘실적 쌓기용 법안’ 발의라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국회 파행이 장기전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는 오히려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 공천을 앞두고 열심히 일한 지표로 평가되는 법안 발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법안 발의 건수는 벌써 19대 추월
6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는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2121건에 달했다. 2016년 4월 총선을 1년여 앞둔 19대 국회 당시 같은 기간(2015년 1월 1일~4월 30일) 1469건이 발의된 것과 비교하면 44.3% 늘었다.
연간으로 따져봐도 법안 발의 건수는 대폭 늘었다. 20대 국회 3년차인 작년 한 해 동안 발의된 법안 건수는 6861건에 달했다. 19대 국회 3년차인 2014년(4636건)보다 절반 가까운 47.9% 급증했다. 20대 국회 개원 이후 지난달 말까지 발의된 법안은 총 2만255건으로, 사상 최대였던 19대 국회(1만8926건)를 이미 넘어섰다.
발의 숫자는 늘었지만 내용이 비슷하거나 부실한 법안이 적지 않다. 일례로 현행 법에서 숫자만 바꾼 ‘숫자갈이 입법’이 대표적이다. 중소·중견기업의 가업상속공제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은 상속 요건 등 일부 내용만 고친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올 들어서만 8건이 발의됐다.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정부가 가업상속공제 요건 완화 방침을 발표한 만큼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들 법안이 병합 심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인스턴트 입법에 ‘품앗이’ 공동 발의도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관련 법안을 쏟아내는 ‘인스턴트 입법’도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성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이른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관련 법안은 지난해에만 약 50건이 발의됐다. 모두 권력형 성범죄 공소시효 기간 연장을 어느 정도 할지 숫자만 조금씩 달랐다.
의원들끼리 ‘품앗이’하듯 공동 발의를 통해 입법 건수를 늘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원법안은 10인 이상 의원의 찬성으로 발의되고 국회 내 법제실 검토만 거치면 상임위로 상정된다. 실제 지난 1일 이철규 의원이 발의한 13개 법안의 공동 발의자 11명은 모두 동일인이었다. 한 보좌관은 “이번에 ‘도장’을 찍어주면 다음 번엔 도움을 달라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국회 보좌진 사이에선 제대로 된 법안 심사도 못하고 업무 효율만 떨어진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당의 환경노동위원회 보좌진은 “최근 하루 10여 건의 공동 발의 요청이 들어오는데, 이 법안 검토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며 “매번 거절하기도 힘들어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어준다”고 토로했다.
실적 쌓기 입법 방지법까지 등장
의원들이 여야 극한 대치에도 법안 발의에 총력을 다하는 이유는 내년 총선 공천 영향이 크다. 각 당은 현역 의원의 의정 활동을 평가할 때 입법 수행 실적을 중요 지표로 삼는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표 발의 법안 건수, 입법 완료 건수, 당론 법안 채택 건수, 입법 공청회 개최 여부 등을 다각도로 고려해 점수를 매긴다. 한 여당 의원 보좌관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법안을 빠르게 내 법안이 통과하면 법안 발의와 입법 완료 실적을 한 번에 채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고민이 담기지 않은 날림 입법은 국가 재정 등에 재앙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국회 차원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회는 파행하는데 실적용 입법은 늘다 보니 법안 가결률은 급락했다. 전체 발의 법안 건수 대비 본회의 가결 법안 비율이 크게 낮아졌다는 설명이다. 20대 국회 법안 가결률은 12.8%로, 18대(18.0%)와 19대(19.6%)보다 낮다. 29.6%를 기록한 17대 국회의 절반도 안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적용 입법 방지법’도 나왔다. 금태섭 민주당 의원은 작년 12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해 법률명 변경 또는 일본식 한자어를 한글로 순화하는 등의 단순자구수정 법률안을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일괄 개정토록 했다. 이 법안 역시 본회의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소관 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국회 파행이 장기전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는 오히려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 공천을 앞두고 열심히 일한 지표로 평가되는 법안 발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법안 발의 건수는 벌써 19대 추월
6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는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2121건에 달했다. 2016년 4월 총선을 1년여 앞둔 19대 국회 당시 같은 기간(2015년 1월 1일~4월 30일) 1469건이 발의된 것과 비교하면 44.3% 늘었다.
연간으로 따져봐도 법안 발의 건수는 대폭 늘었다. 20대 국회 3년차인 작년 한 해 동안 발의된 법안 건수는 6861건에 달했다. 19대 국회 3년차인 2014년(4636건)보다 절반 가까운 47.9% 급증했다. 20대 국회 개원 이후 지난달 말까지 발의된 법안은 총 2만255건으로, 사상 최대였던 19대 국회(1만8926건)를 이미 넘어섰다.
발의 숫자는 늘었지만 내용이 비슷하거나 부실한 법안이 적지 않다. 일례로 현행 법에서 숫자만 바꾼 ‘숫자갈이 입법’이 대표적이다. 중소·중견기업의 가업상속공제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은 상속 요건 등 일부 내용만 고친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올 들어서만 8건이 발의됐다.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정부가 가업상속공제 요건 완화 방침을 발표한 만큼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들 법안이 병합 심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인스턴트 입법에 ‘품앗이’ 공동 발의도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관련 법안을 쏟아내는 ‘인스턴트 입법’도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성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이른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관련 법안은 지난해에만 약 50건이 발의됐다. 모두 권력형 성범죄 공소시효 기간 연장을 어느 정도 할지 숫자만 조금씩 달랐다.
의원들끼리 ‘품앗이’하듯 공동 발의를 통해 입법 건수를 늘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원법안은 10인 이상 의원의 찬성으로 발의되고 국회 내 법제실 검토만 거치면 상임위로 상정된다. 실제 지난 1일 이철규 의원이 발의한 13개 법안의 공동 발의자 11명은 모두 동일인이었다. 한 보좌관은 “이번에 ‘도장’을 찍어주면 다음 번엔 도움을 달라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국회 보좌진 사이에선 제대로 된 법안 심사도 못하고 업무 효율만 떨어진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당의 환경노동위원회 보좌진은 “최근 하루 10여 건의 공동 발의 요청이 들어오는데, 이 법안 검토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며 “매번 거절하기도 힘들어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어준다”고 토로했다.
실적 쌓기 입법 방지법까지 등장
의원들이 여야 극한 대치에도 법안 발의에 총력을 다하는 이유는 내년 총선 공천 영향이 크다. 각 당은 현역 의원의 의정 활동을 평가할 때 입법 수행 실적을 중요 지표로 삼는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표 발의 법안 건수, 입법 완료 건수, 당론 법안 채택 건수, 입법 공청회 개최 여부 등을 다각도로 고려해 점수를 매긴다. 한 여당 의원 보좌관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법안을 빠르게 내 법안이 통과하면 법안 발의와 입법 완료 실적을 한 번에 채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고민이 담기지 않은 날림 입법은 국가 재정 등에 재앙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국회 차원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회는 파행하는데 실적용 입법은 늘다 보니 법안 가결률은 급락했다. 전체 발의 법안 건수 대비 본회의 가결 법안 비율이 크게 낮아졌다는 설명이다. 20대 국회 법안 가결률은 12.8%로, 18대(18.0%)와 19대(19.6%)보다 낮다. 29.6%를 기록한 17대 국회의 절반도 안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적용 입법 방지법’도 나왔다. 금태섭 민주당 의원은 작년 12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해 법률명 변경 또는 일본식 한자어를 한글로 순화하는 등의 단순자구수정 법률안을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일괄 개정토록 했다. 이 법안 역시 본회의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소관 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