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신화' 삼성전자 탄생 뒤엔 최악의 실패 '한비 사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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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21) '20년 대장株'의 탄생
(21) '20년 대장株'의 탄생
외환위기 직후 연 30%대로 치솟았던 기업대출 금리가 한 자릿수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던 1999년 여름. 한국 증시에선 대형주 중심의 활황 장세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이코리아’ 펀드 등 간접투자상품의 유행으로 거래량 상위 우량 대기업들에 연일 뭉칫돈이 흘러들었다.
백미는 삼성전자였다. PC 보급 확대가 불을 지핀 반도체 특수에 힘입어 1999년 7월 한국전력을 누르고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섰다. 코스피지수가 외환위기 이후 최저인 291에서 10개월 만에 1000선을 되찾은 때였다. 삼성전자 기업가치는 약 30조원으로, 이 기간 다섯 배로 불어났다.
1969년 창립 30년 만에 한국 증시의 대장주 자리를 굳힌 삼성전자 신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룹의 최대 위기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는 1987년 작고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생애 가장 쓰디쓴 체험’이라 털어놨던 1966년의 ‘한비(한국비료공업)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비 사건의 발발
“회장님, 빨리 귀국하셔야겠습니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한비 공장에 들여놓을 기계 선적을 독려하고 있던 1966년 9월 16일. 서울에서 긴급 전화가 왔다. 일본에서 들여와 보세(保稅) 창고에 쌓아 둔 OTSA란 제품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OTSA는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의 원료 물질이었다.
소동의 발단은 ‘재벌밀수’란 제목을 달고 나온 9월 15일자 한 신문 보도였다. 수개월 전 부산 세관이 한비의 밀수품을 압류하고 2000만원대 벌금을 매겼다는 내용이었다. ‘비료공장 자재를 몰래 판 직원의 일탈’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뒤늦은 보도를 계기로 온 나라를 흔드는 태풍으로 발전했다. 외화벌이를 위해 간호사와 광부의 독일 출국이 본격화하던 때, 국내 최대 그룹사를 향한 공분은 이듬해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여론몰이와 맞물리면서 확대 재생산을 거듭했다.
당시 초선이었던 김대중·김영삼 의원 등이 속한 민중당은 “권력이 재벌을 감싸고돈 ‘빙산의 일각’이 드러났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 구속, 한비의 국가 귀속, 재무당국 처벌”을 요구하며 맹공을 펼쳤다. 국회 대정부 질의에선 김두한 무소속 의원이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라며 장관들에게 분뇨를 뿌려 의사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정부 보증으로 빚을 얻어 대규모 비료공장을 짓고 있던 이 회장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독과점 지위를 남용한 ‘삼분(三粉: 설탕·밀가루·시멘트) 폭리’ 의혹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게 불과 2년 전 일이었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대체 신사업 구상
“한비 지분 51%를 모두 국가에 바치고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김두한 의원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일인 9월 22일. 이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설탕과 모직 중심이었던 삼성의 신성장 동력으로 10년을 매달린 한비 사업도 헌납하기로 했다. ‘동양 최대 단일 비료공장’ 완공이란 숙원 달성을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이 회장은 1986년 탈고한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OTSA는 요소비료의 제조공정에 쓰이는 약품”이라며 “사원의 부주의로 허가 없이 처분한 과오로 벌금을 물고 일단 끝난 사건이었다”며 억울했던 당시 심정을 담았다.
도망치듯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 회장은 절치부심하며 삼성의 재건 방안을 모색했다. 1968년 2월에는 삼성물산 회장으로 조용히 복귀해 회사에 ‘개발부’를 신설했다. 훗날 삼성전자 부회장에 오른 윤종용 씨(당시 사원)가 합류한 이 부서에 한비를 대체할 신사업을 발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두 달 뒤 개발부는 이 회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제일 앞 장에는 전자사업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삼성전자 탄생
“우리도 전자사업을 하려고 하네.”
현대그룹이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한 1968년 봄, 삼성 안양골프장(현 안양컨트리클럽). 이 회장은 사돈인 구인회 락희(현 LG) 창업자와 커피를 마시다가 불쑥 전자사업 얘기를 꺼냈다. 구 회장은 “(전자사업의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쏘아붙였다. 머쓱해진 이 회장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다. 장남 이맹희 씨가 기억하는 일화다.
이 회장은 전자사업 진출을 결심한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가전업체 산요 회장을 만났다. 기술 이전 약속을 받아낸 그는 1968년 6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자사업 진출 계획을 공개했다. 한국 전자업계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워졌다. 금성사(현 LG전자)를 포함하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민족자본을 말살하려는 매판(買辦) 행위”라며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 회장은 개의치 않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제품 대부분을 수출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얻어냈다.
마침내 삼성의 가전사업은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올렸다. 납입 자본금은 3억3000만원이었다. 사돈에게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구 회장은 그해 12월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구 회장의 3남이자 이 회장의 둘째 사위였던 구자학 씨는 1976년 호텔신라 사장을 마지막으로 삼성을 떠나 금성사로 돌아갔다.
TV 사업 토대로 성장
“발행가액 1000원에 신주를 공모합니다.”
1973년 유가 폭등(1차 오일쇼크) 충격에서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한 1975년 6월 11일. 삼성전자는 9억원어치 주식을 공모하며 유가증권시장에 기업을 공개(IPO)했다. 당시 삼성전자 기업가치는 공모가액 기준으로 불과 30억원이었다. 현재 시가총액은 256조원에 달한다.
산요의 하청 업체로 1970년 수출용 흑백TV 생산을 시작한 삼성전자는 출범 초기 한동안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다. 산요는 핵심 기술 이전과 투자를 꺼렸고 값싼 노동력만 이용하고 싶어 했다. 정부 허가로 내수용 흑백TV 생산을 개시한 2년 뒤인 1974년에서야 비로소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당시 매출 133억원에 순이익은 6억원이었다.
삼성전자는 흑자전환과 상장을 계기로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 상장 직전 주주총회에서 3남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를 새 이사로 선임했다. 감사 자리는 이수빈 이사가 맡았다. 삼성은 이후 자체 기술 개발에 전념하면서 혁신적인 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장 당해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예열이 필요 없는 순간수상방식 TV(이코노TV)를 출시했다. 1979년엔 윤종용 부장이 실무를 맡은 VCR사업부가 국내 최초로 녹화기(VCR) 개발에 성공했다. 기술 이전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은 산요와의 관계는 1983년까지 단계적으로 청산했다.
반도체 사업 진출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해야겠습니다.”
전두환 정부의 컬러 방송 허용으로 컬러TV가 불티나게 팔렸던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에 머물던 73세 이 회장은 홍진기 중앙일보 부회장에게 전화해 반도체 사업 진출 계획을 알렸다. 회사 운명을 바꾼 이날의 결정을 삼성에선 ‘2·8 도쿄 구상’으로 부른다.
미국과 일본이 90%를 장악한 시장을 기술과 돈으로 추격하겠다는 무모한 결단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이 회장은 일본 샤프, 미국 마이크론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으며 사업 강행 의지를 불태웠다. 일본 반도체업계가 훗날 한국과 경쟁하는 ‘부메랑’ 효과를 염려하며 샤프를 비난하자 현지 신문 기고로 직접 진화에 나섰다. “한국이 배우려는 기술은 일본이 총력을 기울이는 첨단 분야가 아니다”며 안심시켰다. 1983년 9월엔 경기 용인시 기흥에 역사적 첫 삽을 떴다.
사업 초기 일본 기업들의 덤핑 공세로 고전하던 한국 반도체산업은 1980년대 중반 절호의 기회를 만난다. 저금리·저유가·낮은 원화 가치 등 ‘3저 호황’이었다. 삼성은 세계 메모리시장에서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다. 1992년에는 권오현 이사 등 반도체 부문 인력들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혁신을 거듭하던 삼성은 1993년 마침내 세계 메모리반도체 분야 점유율 1위 왕좌에 오른다. 2004년에는 일본 10대 전자업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순이익을 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마트폰 분야까지 글로벌 선두 업체로 자리잡았다.
새로운 도전
경제와 사회 전 분야에서 갖는 영향력은 오늘날 삼성을 한국의 자랑이자 개혁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중 잣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검찰은 2017년 스포츠재단에 거액의 후원금을 뇌물로 제공했다는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 수감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현업에 복귀하면서 삼성은 반세기 전 한비 사건을 계기로 전자사업을 구상한 것처럼 새로운 모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4월 ‘2030 반도체 비전’을 공개하고 세계 비메모리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을 밝혔다. 예상 투자금액은 133조원에 달한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백미는 삼성전자였다. PC 보급 확대가 불을 지핀 반도체 특수에 힘입어 1999년 7월 한국전력을 누르고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섰다. 코스피지수가 외환위기 이후 최저인 291에서 10개월 만에 1000선을 되찾은 때였다. 삼성전자 기업가치는 약 30조원으로, 이 기간 다섯 배로 불어났다.
1969년 창립 30년 만에 한국 증시의 대장주 자리를 굳힌 삼성전자 신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룹의 최대 위기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는 1987년 작고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생애 가장 쓰디쓴 체험’이라 털어놨던 1966년의 ‘한비(한국비료공업)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비 사건의 발발
“회장님, 빨리 귀국하셔야겠습니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한비 공장에 들여놓을 기계 선적을 독려하고 있던 1966년 9월 16일. 서울에서 긴급 전화가 왔다. 일본에서 들여와 보세(保稅) 창고에 쌓아 둔 OTSA란 제품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OTSA는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의 원료 물질이었다.
소동의 발단은 ‘재벌밀수’란 제목을 달고 나온 9월 15일자 한 신문 보도였다. 수개월 전 부산 세관이 한비의 밀수품을 압류하고 2000만원대 벌금을 매겼다는 내용이었다. ‘비료공장 자재를 몰래 판 직원의 일탈’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뒤늦은 보도를 계기로 온 나라를 흔드는 태풍으로 발전했다. 외화벌이를 위해 간호사와 광부의 독일 출국이 본격화하던 때, 국내 최대 그룹사를 향한 공분은 이듬해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여론몰이와 맞물리면서 확대 재생산을 거듭했다.
당시 초선이었던 김대중·김영삼 의원 등이 속한 민중당은 “권력이 재벌을 감싸고돈 ‘빙산의 일각’이 드러났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 구속, 한비의 국가 귀속, 재무당국 처벌”을 요구하며 맹공을 펼쳤다. 국회 대정부 질의에선 김두한 무소속 의원이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라며 장관들에게 분뇨를 뿌려 의사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정부 보증으로 빚을 얻어 대규모 비료공장을 짓고 있던 이 회장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독과점 지위를 남용한 ‘삼분(三粉: 설탕·밀가루·시멘트) 폭리’ 의혹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게 불과 2년 전 일이었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대체 신사업 구상
“한비 지분 51%를 모두 국가에 바치고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김두한 의원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당일인 9월 22일. 이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설탕과 모직 중심이었던 삼성의 신성장 동력으로 10년을 매달린 한비 사업도 헌납하기로 했다. ‘동양 최대 단일 비료공장’ 완공이란 숙원 달성을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이 회장은 1986년 탈고한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OTSA는 요소비료의 제조공정에 쓰이는 약품”이라며 “사원의 부주의로 허가 없이 처분한 과오로 벌금을 물고 일단 끝난 사건이었다”며 억울했던 당시 심정을 담았다.
도망치듯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 회장은 절치부심하며 삼성의 재건 방안을 모색했다. 1968년 2월에는 삼성물산 회장으로 조용히 복귀해 회사에 ‘개발부’를 신설했다. 훗날 삼성전자 부회장에 오른 윤종용 씨(당시 사원)가 합류한 이 부서에 한비를 대체할 신사업을 발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두 달 뒤 개발부는 이 회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제일 앞 장에는 전자사업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삼성전자 탄생
“우리도 전자사업을 하려고 하네.”
현대그룹이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한 1968년 봄, 삼성 안양골프장(현 안양컨트리클럽). 이 회장은 사돈인 구인회 락희(현 LG) 창업자와 커피를 마시다가 불쑥 전자사업 얘기를 꺼냈다. 구 회장은 “(전자사업의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쏘아붙였다. 머쓱해진 이 회장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다. 장남 이맹희 씨가 기억하는 일화다.
이 회장은 전자사업 진출을 결심한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가전업체 산요 회장을 만났다. 기술 이전 약속을 받아낸 그는 1968년 6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자사업 진출 계획을 공개했다. 한국 전자업계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워졌다. 금성사(현 LG전자)를 포함하는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민족자본을 말살하려는 매판(買辦) 행위”라며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 회장은 개의치 않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제품 대부분을 수출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얻어냈다.
마침내 삼성의 가전사업은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올렸다. 납입 자본금은 3억3000만원이었다. 사돈에게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구 회장은 그해 12월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구 회장의 3남이자 이 회장의 둘째 사위였던 구자학 씨는 1976년 호텔신라 사장을 마지막으로 삼성을 떠나 금성사로 돌아갔다.
TV 사업 토대로 성장
“발행가액 1000원에 신주를 공모합니다.”
1973년 유가 폭등(1차 오일쇼크) 충격에서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한 1975년 6월 11일. 삼성전자는 9억원어치 주식을 공모하며 유가증권시장에 기업을 공개(IPO)했다. 당시 삼성전자 기업가치는 공모가액 기준으로 불과 30억원이었다. 현재 시가총액은 256조원에 달한다.
산요의 하청 업체로 1970년 수출용 흑백TV 생산을 시작한 삼성전자는 출범 초기 한동안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다. 산요는 핵심 기술 이전과 투자를 꺼렸고 값싼 노동력만 이용하고 싶어 했다. 정부 허가로 내수용 흑백TV 생산을 개시한 2년 뒤인 1974년에서야 비로소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당시 매출 133억원에 순이익은 6억원이었다.
삼성전자는 흑자전환과 상장을 계기로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 상장 직전 주주총회에서 3남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를 새 이사로 선임했다. 감사 자리는 이수빈 이사가 맡았다. 삼성은 이후 자체 기술 개발에 전념하면서 혁신적인 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장 당해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예열이 필요 없는 순간수상방식 TV(이코노TV)를 출시했다. 1979년엔 윤종용 부장이 실무를 맡은 VCR사업부가 국내 최초로 녹화기(VCR) 개발에 성공했다. 기술 이전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은 산요와의 관계는 1983년까지 단계적으로 청산했다.
반도체 사업 진출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해야겠습니다.”
전두환 정부의 컬러 방송 허용으로 컬러TV가 불티나게 팔렸던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에 머물던 73세 이 회장은 홍진기 중앙일보 부회장에게 전화해 반도체 사업 진출 계획을 알렸다. 회사 운명을 바꾼 이날의 결정을 삼성에선 ‘2·8 도쿄 구상’으로 부른다.
미국과 일본이 90%를 장악한 시장을 기술과 돈으로 추격하겠다는 무모한 결단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이 회장은 일본 샤프, 미국 마이크론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으며 사업 강행 의지를 불태웠다. 일본 반도체업계가 훗날 한국과 경쟁하는 ‘부메랑’ 효과를 염려하며 샤프를 비난하자 현지 신문 기고로 직접 진화에 나섰다. “한국이 배우려는 기술은 일본이 총력을 기울이는 첨단 분야가 아니다”며 안심시켰다. 1983년 9월엔 경기 용인시 기흥에 역사적 첫 삽을 떴다.
사업 초기 일본 기업들의 덤핑 공세로 고전하던 한국 반도체산업은 1980년대 중반 절호의 기회를 만난다. 저금리·저유가·낮은 원화 가치 등 ‘3저 호황’이었다. 삼성은 세계 메모리시장에서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다. 1992년에는 권오현 이사 등 반도체 부문 인력들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혁신을 거듭하던 삼성은 1993년 마침내 세계 메모리반도체 분야 점유율 1위 왕좌에 오른다. 2004년에는 일본 10대 전자업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순이익을 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마트폰 분야까지 글로벌 선두 업체로 자리잡았다.
새로운 도전
경제와 사회 전 분야에서 갖는 영향력은 오늘날 삼성을 한국의 자랑이자 개혁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중 잣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검찰은 2017년 스포츠재단에 거액의 후원금을 뇌물로 제공했다는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 수감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현업에 복귀하면서 삼성은 반세기 전 한비 사건을 계기로 전자사업을 구상한 것처럼 새로운 모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4월 ‘2030 반도체 비전’을 공개하고 세계 비메모리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을 밝혔다. 예상 투자금액은 133조원에 달한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