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디지털 세상의 '보통국'으로 남으려는가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는 ‘실물 세상’이고 또 하나는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세상’이다. 예전에 디지털 세상은 실물 세상을 지원하고 보조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은행 업무를 예로 들어보자. 고객이 은행 창구의 직원을 통해 일을 보고 나면, 이후 컴퓨터가 그 내용을 처리해 해당 창구에 그 결과를 제시한다든지 하는 일이 디지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또 소비자들이 백화점에서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재관리, 물류 등의 업무를 자동화해 지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실물 세상의 일들이 되레 디지털 세상으로 이전돼 진행되고 또 실물 세상에서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디지털 세상에서는 가능해지면서 디지털 세상에서의 경쟁력이 실물 세상의 기업의 경쟁력 또는 개인의 경쟁력에 매우 중요한 시대가 됐다.

“어떤 비즈니스를 하든지 디지털 경쟁력을 갖춘 기업의 이익률이 그렇지 못한 기업의 이익률보다 평균 30% 높게 나온다”고 한 피터 웨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연구를 보면 실물 세상이 디지털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디지털 경쟁력의 이런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질 전망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 기업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최근 세계 각국은 소위 ‘디지털 혁신’이란 구호 아래 디지털 경쟁력을 높이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실물 세상의 핵심 산업인 제조업의 추락을 경험한 미국은 오래전부터 디지털 경쟁력을 키워 왔다. 그 결과 ‘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이란 거대 디지털 플랫폼 기업을 기반으로 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 디지털 세상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예전 우리나라처럼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제조업을 육성하고 있는 중국도 디지털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지금은 미국보다 많은 자본을 디지털 혁신 분야에 투자하고 있으며, 전 세계 e커머스 시장의 40%를 석권하는 등 디지털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 절반 정도의 영토에, 130만 명이 사는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혁신 전략도 흥미롭다. 2014년부터 디지털ID를 이용해 발급하기 시작한 가상영주권은 3년 만에 4만7000명이 받았으며, 이들 중 6000여 명이 1시간 만에 비대면으로 창업을 인가하는 시스템의 도움을 얻어 창업했다. 이들 창업기업은 법인세율 20%를 적용받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가상영주권 발급을 통해 2025년까지 인구를 1000만 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실물 세상에선 인구가 적고 영토도 작은 나라인데 디지털 세상에서는 전 세계를 디지털 영토로, 전 세계 인구를 디지털 시민으로 활용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세계 최초로 WCDMA(광대역 부호 분할 다중 접속) 서비스와 초고속 정보통신망에 대한 과감한 투자 덕분에 정보통신기술(ICT)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또 전자정부도 선제적으로 도입하는 등 ‘IT 강국 코리아’ 소리를 들을 정도로 디지털 세상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이후 부진한 규제개혁과 선제적 정책 지원 부재 탓에 ‘IT 보통국가’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는 추격형 경제 모델을 기반으로 제조업 중심의 성공신화를 써왔다. 그러나 제조업 경쟁력이 갈수록 약화되는 것을 보면 디지털 세상에서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낼 전략이 있는지 걱정하게 된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디지털 전략은 단순한 IT 개발이나 4G, 5G 등의 통신 인프라 구축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혁신하고, 복지서비스를 효율화하며, 제조업의 핵심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국가 차원의 포괄적 전략이어야 한다.

아직은 먼 미래의 막연한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전략에서 실패한 한 영화산업의 공룡이 불과 10년 만에 파산하는 것을 보면서 조급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필자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