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실패한 사회주의가 소멸 않는 이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새삼 사회주의 열풍이 불고 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는 규제와 보조금을 통한 분배 중시 이념이다. 20세기엔 동유럽과 옛 소련 경제를, 그리고 최근엔 베네수엘라 경제를 초토화시킨 이념이 아닌가! 중국, 쿠바, 북한 등 사회주의는 가는 곳마다 실패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잘나가던 경제가 무너져 일자리가 소멸되고 결국에는 마이너스 성장이다.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실패함에도 소멸되지 않는 이유가 흥미롭다. 우선, 좌파는 정책(신념)을 미리 감성적으로 고정해 놓고 팩트를 변경해 정책의 옳음을 추론하는 전략(동기화된 추론) 때문에 정책 실패를 간과하기 십상이다. 정책 성공의 증거는 과장하고 실패의 증거는 무시하는 확증편향이 그런 전략의 하나다. 평양에서 해맑게 웃는 어린아이를 보고 사회주의 은덕으로 행복한 것이라고 떠들거나,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성공을 입증하는 듯 보이는 고용·투자 데이터를 과대 포장한다. 정책 실패를 놓고 전임 정부를 탓하고,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언론의 선동에 속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회주의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심리 전략이다.

‘실패한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요인으로 중요한 것은 ‘합리적 불합리’ 논리다. 소주성 정책은 틀렸다는 게 드러났고, 그래서 불합리하지만 그걸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는 논리다. 그 정책을 포기하면 매우 큰 감성적 비용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 신념을 마음에 품고 이를 고수하면 종교의 신앙처럼 기쁨과 자긍심 그리고 심리적 안도감이 우러난다. 합리적 불합리는 널리 알려진, 그래서 공적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적용된다. 이념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비용이 보통사람보다 그들에게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좀 솔직해지자, 소주성은 실패한 것 아닌가”라고 그들이 소주성 정책의 실패를 인정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들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을 실망시켜 배반자요, 역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비난이 사회주의의 실패를 인정하는 공적 지식인들이 부담해야 할 혹독한 비용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어떤 비용도 치를 이유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탈(脫)원전, 4대강 보 철거 같은 황당한 정책도 이를 지지하는 환경운동가, 청와대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틀렸음에도 지식인들이 예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해악은 시민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베네수엘라 경제가 초토화된 결과 시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게 된 반면 집권층은 진수성찬을 차려먹는다. 탈원전, 소주성 정책의 직격탄을 맞은 계층의 비명이 커지고 있지만 이들 정책을 옹호하는 공적 지식인들은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태평하다.

독재자 김정은이 우리 대기업 2, 3세보다 낫다고 하고, 어린이 인권침해라고까지 비난받는 북한의 집단체조를 “가장 위대한 쇼”라고 좌익 지식인들이 예찬하는 이유도 이들이 북한 체제의 강제노동,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 예찬의 직접 피해자는 북한의 가련한 주민들일 뿐이다.

실패한 사회주의가 죽지 않는 마지막 이유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적 심리구조는 부족 혈연으로 소규모 집단을 이뤄 수렵채취 생활을 했던 석기시대의 산물이다. 경쟁과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적대시하고 평등한 나눔, 유대감 등 가족 친구관계 같은 소규모 사회의 도덕률을 좋아하는 건 그래서다.

문제는 ‘본능의 정치화’다. 평등, 공정, 정의를 실현한다며 납세자들을 쥐어짜고 국고를 탕진하면서 ‘퍼주기 복지’에 골몰하고 선심성 공공근로 및 토목사업 등을 벌여 모든 계층과 연령대에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패는 필연임에도 그 이념이 소멸되지 않는 건 ‘감성과 이성의 정치적 결탁’ 때문이다. 감성과 이성이 서로 분리, 독립되고 이성의 오남용이 극복될 때에야 비로소 자유시장이 확립, 유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