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벤산 정상에서 바라본 로엔마을과 노르피오르의 풍경. 호벤산까지는 로엔 스카이리프트로 쉽게 올라 갈 수 있다.
호벤산 정상에서 바라본 로엔마을과 노르피오르의 풍경. 호벤산까지는 로엔 스카이리프트로 쉽게 올라 갈 수 있다.
노르웨이는 순백의 얼굴을 한 거대한 성채처럼 차갑게 빛을 낸다. 겨울왕국이라고 하지만 노르웨이에도 어느새 봄이 왔다. 사과나무와 배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피오르 인근 마을에는 설산처럼 하얀 미소를 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피오르는 어느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또 위대한 풍광을 담을 사진기는 사람의 눈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 풍경은 결국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피오르에도 빙하에도 그리고 설산에도 시간의 더께가 묻어 있다. 긴 시간을 넘어 도착한 노르웨이에서 발견한 것은 1000년의 시간을 견뎌낸 자연의 숭고한 인내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피오르 관광 출발지 베르겐

빙하로 둘러싸인 '순백의 성채'
피오르 관광의 출발지인 베르겐(Bergen)은 노르웨이 제2의 도시다. 12~13세기에는 노르웨이 수도이기도 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1070년 노르웨이의 바이킹 왕 울라프가 건설한 이 도시는 13세기 한자동맹의 중심도시가 되며 성장을 거듭했다. 원래 베르겐 지역은 인근 북해와 발트해의 청어와 대구를 잡는 근거지였다. 이 때문에 무역상과 어부, 선원들이 늘 북적거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항구도시인 베르겐의 브뤼겐 지구에는 아직도 당시 활달했던 수산물 근거지로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붕은 뾰족하고 형형색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목조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브뤼겐은 오래된 도시의 멋이 남아 있다. 1702년 대화재로 한 차례 소실됐다가 복원된 목조건물들의 건물 1층은 하역장으로, 2·3층은 숙소나 사무실로 쓰였다고 한다. 건물 뒤편에는 13세기 한자 상인들이 거래했던 생선인 ‘대구’ 모양의 목각 동상도 발견할 수 있다. 브뤼겐 거리에서 중세시대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3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석조건물인 호콘성에서 1270년 지은 코센크란츠 타워, 노르웨이 최초의 여성 병원까지 수백년의 세월을 견딘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베르겐의 브뤼겐 지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베르겐의 브뤼겐 지구
브뤼겐 거리 뒤편에는 베르겐을 병풍처럼 둘러싼 일곱 개의 산 중 하나인 플뢰위엔산으로 가는 산악열차 승강장이 있다. 열차라고 하지만 산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불과 2~3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플뢰위엔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베르겐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알록달록한 집과 바다, 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고무보트 타고 송네피오르를 질주

노르웨이 여행의 백미는 피오르 여행이다. 피오르는 노르웨이어로 ‘내륙 깊이 들어온 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약 200만 년 전 만들어진 빙하가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고 기온이 상승하면서 빙하가 녹자 빙하가 깎아낸 U자 형태의 골짜기가 생겼다. 골짜기에 바닷물이 유입돼 만들어진 좁고 기다란 만이 바로 피오르다. 피오르는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등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유독 노르웨이가 주목받는 것은 피오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매력적인 풍광 때문일 것이다.
예이랑에르 뒤편 외르네스빙엔 전망대에서 바라본 피오르
예이랑에르 뒤편 외르네스빙엔 전망대에서 바라본 피오르
피오르는 유람선을 타고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지만 고속단정(RIB)을 타면 보다 구석구석 생동감 있게 탐험할 수 있다. 고속단정의 출발지인 발레스트란은 피오르 중에서 가장 넓고 긴 송네피오르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피오르를 끼고 있는 여느 마을처럼 마을 뒤편엔 거대한 설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하지만 마을 어귀는 화사한 순풍이 살랑거리며 꽃을 일으켜 세운다. 하얀색 사과나무에도 자두나무에도 한창 물이 올랐다.

고속단정을 타려면 마치 소방수 복장을 연상하게 하는 형광색 방수복을 입어야 한다. 물과 바람도 막아주고 위급할 때는 라이프재킷 역할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고속단정은 일종의 고무보트지만 최고시속이 92㎞가 넘는다. 일단 속도가 제대로 붙으면 아찔할 정도로 피오르를 질주한다. 게다가 수면이 아무리 잔잔해도 물의 표면과 보트가 닿으면서 느껴지는 충격파는 시골길을 쿠션이 형편없는 트럭을 타고 달리는 것 같다. 한마디로 엉덩이에 불이 날 정도다. 피오르는 바다처럼 넓고 크다.
 바이킹체험마을인 구드방엔에서 관광객이 바이킹 체험을 하고 있다
바이킹체험마을인 구드방엔에서 관광객이 바이킹 체험을 하고 있다
2시간가량을 송네피오르와 내뢰피오르(좁은 피오르)를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피오르 관광의 백미는 산꼭대기 설산에서 녹은 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를 보는 것이다. 해발 800m 정도의 정상에서 내려오는 물은 여인이 풀어놓은 머리카락처럼 풀어헤쳐져 장관을 이룬다. 폭포는 한 가닥으로만 된 것도 있고 여러 가닥으로 된 것도 있다. 폭포는 겉으로는 순해 보여도 막상 다가서면 대단히 거친 모습을 드러낸다. 일렁거리는 하얀 물살과 우렁찬 소리가 마치 야수의 울음소리처럼 맹렬하다. 보트는 어느새 내뢰피오르로 접어들었다. 피오르 끝에는 바이킹 체험 마을인 구드방엔이 있다. 바이킹 복장을 한 여성이 통나무 과녁에 도끼를 던지는 시범을 보이고 손도끼를 치켜든 채 진짜 바이킹이라도 된 듯 무서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슴 인형에 화살을 쏘아 보거나 도끼를 던지는 소소한 체험인데도 여행객들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수묵화처럼 묘한 풍경 연출하는 피오르

피오르를 향하는 길은 때로는 지루함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발레스트란에서 노르피오르의 레온까지는 버스를 타고 건너야 한다. 탈 때는 몰랐는데 막상 버스를 타고 해발 750m의 가울라르피엘레 정상에 올라서니 버스가 올라온 아슬아슬한 궤적이 보인다. 길이 워낙 험하고 눈이 많이 내리다 보니 겨울에는 아예 차가 못 다니고 5월 초가 돼야 통행할 수 있다고 한다. 도로는 1938년 12월 개통했다. 당시 150여 명의 지역 주민이 하루 8시간30분이나 되는 고된 노동을 견디며 만들어낸 피와 땀이 어린 도로다. 도로 주변에는 폭포가 보이고 폭포가 떨어진 물이 계곡물이 돼 장쾌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폭포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철제다리가 놓여 있다. 수량이 풍부해서인지 수력발전소가 들어설 뻔했다가 무산됐다고 한다. 도로 정상에서 아랫마을까지 14개의 폭포와 7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한자동맹시절 거래되던 ‘대구’ 모양으로 만든 목각 동상
한자동맹시절 거래되던 ‘대구’ 모양으로 만든 목각 동상
노르피오르의 마지막 마을인 로엔에서는 비교적 쉽게 피오르를 감상할 수 있다. 2년 전에 건설한 케이블카 로엔 스카이리프트가 있기 때문이다. 워낙 고지대를 오르는 케이블카라서 그런지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수직의 벽을 올라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케이블카를 타고 호벤산 정상(1101m)에 올라서니 장쾌한 노르피오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둘러봐도 작은 마을과 피오르만 보인다. 설산은 수묵화처럼 짙은 농담을 만들고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르는 아득한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빙하로 둘러싸인 '순백의 성채'
전망대에서 내려와 피오르를 만든 빙하를 만나러 올덴계곡으로 향했다. 노르웨이에는 1593개나 되는 빙하가 있다. 브릭스달(Briksdal) 빙하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크기도 크고 전망하기 편한 곳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빙하를 만나려면 트롤카(troll car)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개조한 트럭 같은 느낌의 트롤카는 힘도 좋고 잘 미끄러지 않는다. 트롤카로 20분 정도 가니 계곡을 가득 채운 거대한 빙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계곡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했다고 하는데 지구온난화 때문에 크기가 반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빙하 아래에는 그리 크지 않은 호수가 있다. 호수 물은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차갑고 투명하다. 수천년의 시간에 갇힌 호수를 말없이 바라보는데 같이 간 동료들이 빙하수를 마시고 있다. 빙하수는 사서 먹는 생수와는 맛이 달랐다. 시간의 입자가 녹아 있기 때문일까?

익스트림 스포츠 즐기는 노르웨이 사람들

베르겐의 전통주인 사과로 발효한 ‘사이다’
베르겐의 전통주인 사과로 발효한 ‘사이다’
인구 200여 명의 작은 마을 예이랑에르(Geiranger)는 피오르 여행의 백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마을 뒤편으로 폭포가 흐르고 높은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마을을 돌아 바다로 향한다. 엄청난 소리가 나는 폭포를 거슬러 계단을 타고 가면 아슬아슬한 곳에 호텔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을 둘러보려면 작은 2인용 전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소형 오토바이만 한 크기지만 언덕도 힘있게 올라가고 시속 70㎞는 거뜬히 넘어선다.

전기차를 타고 전망대에 서면 벼랑 끝에 바위가 있고 그 아래서 보는 피오르가 절경이다. 단언컨대 다른 어떤 지역에서 본 피오르보다 박진감 있고 짜릿하다. 피오르의 푸른 물빛과 함께 절벽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마을 반대편 도로에도 전망대가 하나 더 있다. 외르네스빙엔(Ørnesvingen), 우리말로 ‘독수리 날개’ 전망대쯤 된다. 수직 절벽인 건 마찬가지인데, 튼튼한 콘크리트에 안전 펜스까지 설치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피오르를 감상할 수 있다. 마을 아래에는 농가가 있는데 전체 주민이라고 해야 겨우 7명이라고 한다. 40대 여성 농장 주인은 일행을 환영하며 담담디라는 선율이 반복되는 전통음악을 들려준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일상이 편안해서인지 대단히 모험적인 익스트림 스포츠를 좋아한다.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면서 지루한 삶을 견디는지도 모른다. 노르웨이 사람은 아니지만 익스트림 스포츠의 일단을 체험해 볼 수 있다고 해서 암벽 등반을 선택했다. 람페스트레켄(537m)이라는 비교적 높지 않은 산인 데다 산에 오르면 피오르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등반을 시작했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만 오르면 그 이후부터는 비교적 쉬운 코스라는 가이드에 말에 용기를 냈다. 쇠말뚝을 잡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절벽을 넘어서니 이런 세상에 까마득한 절벽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한 코스를 넘어설 때마다 목에 침이 마르고 저절로 욕이 튀어 나왔다. 허리띠에 2중 안전장치를 한 하네스를 찼는데도 수직 벽을 올라갈 때마다 심장이 터져나올 것처럼 겁이 났다. 이리저리 긁히면서 2시간 만에 360m 높이의 롬스달세겐 절벽에 섰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베르겐=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여행메모

인천에서 노르웨이 베르겐으로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터키항공으로 갈 경우 터키 이스탄불에서 경유해서 들어가야 한다. 베르겐은 오슬로에서 국내선을 타고 가야 한다. 항공기를 두 번 경유하고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쳐 대략 20시간 정도 걸린다. 대한항공이 6월 14일~8월 9일 한시적으로 매주 금요일 오슬로행 직항 노선을 열 예정이다.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1크로네=약 135.89원(5월 15일 기준). 노르웨이 물가는 살인적이라고 할 만큼 비싸다. 물 한 병 값이 40크로네(5435원), 국내 생수의 7~10배 수준이다. 빅맥버거는 91크로네(1만2365원)나 되니 대략 한국의 2배 가격이다.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 발레스트란 고무보트 투어는 750크로네(10만1917원), 전기차 1시간 대여비도 800크로네(10만8712원), 온달스네스 암벽 등반 비용은 990크로네(13만4531원)다. 전압은 220V여서 국내에서 쓰던 가전제품을 그대로 쓸 수 있다. 호텔에 별도의 먹는 물을 비치한 곳이 거의 없다. 수돗물을 마시면 된다. 일회용품이 없는 경우도 많으니 미리 챙겨가는 것이 좋다. 노르웨이와 피오르 전체 여행 정보는 피오르노르웨이닷컴에서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