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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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 상장사들이 인수합병(M&A)를 진행할 때 계약서 등 관련 서류를 의무적으로 제출·공시하게끔 한 금융감독원의 내부지침 변경을 두고 관련 업계가 고민에 빠졌다. 금감원은 최근 코스닥시장에서 소위 ‘작전’ 세력이 낀 무자본 M&A 사건이 잇따르자 투자자 보호를 위해 규정을 강화했다. 하지만 영업비밀 등 민감한 정보가 담겨 있는 사적 계약을 당국과 일반에 공개토록 한 지침이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 활동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M&A계약서 공시 의무화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금감원은 기업이 M&A를 진행해 ‘주요사항보고서’를 제출할 때는 주식매매계약서, 합병계약서 등 M&A 관련 계약서를 원칙적으로 공개하도록 내부지침을 바꿔 지난달 29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사업보고서 제출 대상인 상장사나 외부감사대상으로 증권 소유자가 500인 이상인 법인이 대상이다.

금감원이 이처럼 규정을 바꾼 이유는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기업을 인수한 후 시세조종이나 횡령을 통해 차익을 보려는 무자본 M&A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다. 무자본 M&A는 작전 세력들이 자금력이 없는 상태에서 사채를 끌어들여 코스닥 상장사의 경영권을 인수한 뒤 해당 기업의 주식이나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 인수대금을 치르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이들의 폐단에서 일반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공시 규정 강화가 필요하다고 금감원은 설명하고 있다.

주요사항보고서는 사업보고서 제출 대상인 법인에 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이 발생했을 때 이를 투자자에게 적시에 공시하는 것이다. M&A를 겪는 기업들은 이 과정에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 주식매매계약(SPA) 체결, 딜 클로징 등 주요 시점마다 주요사항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사실 현행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은 기업이 자기주식의 취득, 처분, 합병 등 기업지배구조의 변경과 관련된 사항을 진행할 때 주식매매계약서, M&A 관련 계약서를 첨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간 보안이 요구되는 사안이 담긴 서류는 첨부하지 않거나 금감원에만 제출하고 일반 대중에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허용됐다.

변경된 지침에 따르면 대상 기업은 주요사항보고서 제출 시 계약서 원본은 금감원에 제출하고, 핵심산업기술, 영업비밀, 내부검토정보 등 비공개를 원하는 정보는 별도의 서류로 작성 후 제출해 공시해야 한다. 금감원은 공시시점(의사결정)과 계약체결 시점이 다를 수 있는 M&A 관련 사항에 대해선 사후 첨부가 가능하도록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M&A 등 주요사항 발생 시 보다 자세한 정보를 공개해 투자자들의 알권리를 보호한다는 취지”라며 “현재도 상법상 합병 시 계약서를 합병일로부터 6개월까지 회사 내에 비치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적 거래 자유 침해”

그러나 M&A를 ‘밥줄’로 삼고 있는 기업·사모펀드들은 이 같은 금융당국의 조치에 당혹해하고 있다. M&A 관련 서류의 주주 간 계약서엔 인수 대상이나 금액 등 일반적인 사항뿐 아니라 거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세세한 내용이 담기기 때문이다.

특히 인수 후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위험)에 대해 매각자와 인수자가 관련 사항을 상대방에게 진술하고, 안심하라고 보장하는 ‘진술과 보장’엔 실제 영업비밀이나 내부정보, 법적 분쟁 등 내밀한 내용이 포함된다. 한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는 “진술 내용이 허위로 밝혀지면 각종 페널티(벌칙) 조항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양측은 상대방의 약점을 치열하게 파고들게 되고 그 내용이 고스란히 계약서에 담긴다”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선 민감한 정보가 담겨있는 M&A계약서를 의무적으로 금융당국에 제출, 공개하도록 한 것은 사적 계약인 거래 당사자들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정보의 공개 범위를 공시 주체가 정할 순 있지만 금감원에 비공개 적정성 여부를 심사받아야 하고, 사후적으로라도 금감원에 계약서 원본을 제출하고 이 역시 심사받게 된 것도 M&A 당사자들로선 큰 부담이다.

한 IB 관계자는 “섣불리 정보를 공개했다 인수 과정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고, 사후 공개한다고 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며 “M&A를 재료로 한 작전 세력으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정상 기업의 계약까지 당국이 세밀히 들여다보는 것은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금감원에 정보가 집중되면 그 정보가 다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어 우려가 크다”고 덧붙였다.

황정환/김채연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