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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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한 군데인 지하철 영등포역 삼거리에서 두툼한 주식 뭉치를 들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증권회사 사원이 있었다. 그는 한 은행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주식 뭉치를 건네준 뒤 돈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은행의 주식 매수 수도결제였다.

은행에서 나와 인근 보험사로 향했다. 여기서는 보험사 직원에게 돈을 건네주고 주식 뭉치를 받았다. 보험사의 주식 매도 수도결제였다. 이렇게 종일 영등포를 휩쓸고 다녔다. 이 사원은 2012년 이 증권사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나재철 대신증권 사장(59)이다.

나 사장은 1985년 대신증권에 공채로 입사했다. 당시 증권사에 갓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 중에는 인사, 총무 등 본사 지원부서 근무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업점 근무는 고되다’는 인식이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홈트레이딩시스템(HTS)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을 통한 거래가 없던 시절이었다. 증권사 영업맨들은 매수·매도 희망자를 직접 만나 거래 주문을 받아야 했다.

나 사장 입사 동기들도 대부분 본사 근무를 지망했다. 하지만 그는 “영업점에 가겠다”고 먼저 손을 들었다. “주식 거래에서 개인투자자 비중이 컸기 때문에 수익의 90%가 영업점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업무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지요.”

나 사장은 “별의별 투자자들과 대면하면서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다”며 “이것이 회사생활을 이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번 인연을 맺은 고객들이 진정성 있는 모습을 잘 봐줘 고비 때마다 도와줬다”고도 했다.

나재철 리더십의 핵심은 인정(人情)

나 사장은 1960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광주 인성고와 조선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대신증권에서만 30년을 보냈다. 임원이 되기 전까지 소매영업 일선에서 1등을 놓친 적이 거의 없는 ‘영업통’이다.

가는 곳마다 뛰어난 성과를 냈기 때문에 입사 동기들 가운데 진급이 가장 빨랐다. 그는 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좋은 성과를 냈기 때문에 빨리 진급하고 오래 일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능력만이 그가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니다. “회사생활 하면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회사,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돈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나 사장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있을 때 리더십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며 “이런 애정은 회사 사정이 안 좋아졌을 때 빛을 발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을 때 서울 양재동지점장으로 일하면서 겪은 일을 들려줬다.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직원이 사표를 들고 왔더군요.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습니다. 매일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내일은 사정이 반드시 더 좋아진다. 힘 내자’고 독려했어요. 그렇게 직원들을 다독이다 보니 가망이 없어 보이던 상황이 서서히 반전됐습니다.” 나 사장은 “당장 내가 힘들다고 직원들을 다그치기만 했다면 그런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사표를 들고 왔던 직원은 나중에 이사가 됐다”고 말했다.

긴 호흡으로 보는 안목 있어야

그는 2012년 대표이사가 됐다. 대신증권이 그에게 기대한 건 ‘구원투수’ 역할이었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 유럽 재정위기 등의 여파로 국내 증권업계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 사장이 대표가 된 이듬해 대신증권도 외환위기 후 처음 적자를 냈다.

그는 위기 때 ‘사령탑’이 돼 회사가 다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신증권은 최근 3년간 740억원(2016년)→1158억원(2017년)→1407억원(2018년)으로 순이익을 불렸다.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로는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꼽힌다. 낮았던 부동산 투자 비중을 늘린 게 대표적인 사례다. 나 사장은 “미국 뉴욕, 일본 도쿄 등 선진국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지역에 주로 투자했다”며 “가장 안전하고, 위기가 와도 회복이 빠른 곳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싱가포르에 부동산 투자를 위한 법인을 세웠고 일본 법인 설립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CEO 7년차인 그는 현재 증권업계에서 손꼽히는 장수 CEO 중 한 명이다. 나 사장은 “대표가 되고 초기에 겪은 난관들이 예방주사처럼 나를 튼튼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상황을 살펴보라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절실하게 살길을 모색하면 기회는 다시 열린다고요.”

‘존경받는 기업’ 만드는 게 목표

나 사장은 직원들과 토론하는 걸 좋아한다. 관념적이고 입에 발린 소통은 싫어한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으로서의 토론을 즐긴다. 독불장군처럼 굴다가 일을 그르치는 사람을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일이 잘 안 풀릴 때 직원을 탓하기보다는 그들과 토론해 원인을 찾는다”며 “경험상 이렇게 접근했을 때 문제가 가장 잘 해결됐다”고 설명했다.

나 사장의 임기는 내년까지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도 언젠가 후임자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 나 사장에게 “CEO로 일하는 동안 가장 이루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대신증권을 존경받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다”고 답했다. “존경받지 못하는 기업은 사상누각과 같아 위기가 닥치면 쉽게 무너집니다. 소비자, 금융권 동료, 사회에서 존경받을 때 1000년 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지요.”

젊은 직원과 기성세대 간 융화도 그가 요즘 관심을 두는 주제다. 나 사장은 ‘최근 입사하는 젊은 직원들의 생각이 기성세대와 많이 다르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젊은 직원들에게 요즘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얘기는 뭘까.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남을 배려했을 때 그게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습니다.”
나재철 대신증권 사장, 구원투수 등판 7년…적자서 1000억대 순익 일궈
90년생부터 G2 분쟁까지 열공…'숫자' 너머에서 경영 해법 찾는 나 사장

나재철 대신증권 사장(사진)은 회사의 미래 전략을 짤 때 회사 실적이나 한국 경제성장률 등 숫자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수치를 놓고 씨름해서는 답을 찾기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고경영자(CEO)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정세,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 변화 방향까지 모두 염두에 둬야 합니다. 숫자만으로는 이런 것들을 읽어내기가 어렵지요.”

나 사장은 책을 읽고, 사색하고, 토론한다. 관심 분야도 다양하다. 최근엔 젊은 직원들과 생각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임홍택 작가의 《90년생이 온다》(웨일북)를 정독했다. “이 책을 통해 공정한 인사평가, 정시 출퇴근 준수 등 기업경영의 기본을 엄격하게 지키는 게 젊은 직원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길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예정된 전쟁》(세종서적)도 집중해서 읽은 책이다. “글로벌 증시를 뒤흔들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집어들었다”고 했다.

나 사장은 “미·중 갈등은 단순한 무역전쟁이 아니라 거대한 두 지배세력의 주도권 다툼”이라며 “틈바구니에 낀 한국에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제정치적 갈등에 따른 피해를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며 “산업현장을 다녀보면 미·중 무역갈등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흐름은 투자은행(IB)사업 등을 통해 기업금융 비중을 높이고 있는 증권회사들에도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나 사장은 “미·중, 한·일 갈등이 고조되면서 증권사들도 리스크(위험) 관리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 나재철 사장 프로필

△1960년 전남 나주 출생
△1979년 광주 인성고 졸업
△1986년 조선대 기계공학과 졸업
△2007년 한국외국어대 경영학 석사
△1985년 대신증권 공채 12기 입사
△2008년 대신증권 리테일사업본부장
△2009년 대신증권 홀세일사업본부장
△2011년 대신증권 기업금융사업단장
△2012년 대신증권 대표이사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