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컨설팅 업계 최초 한국인 CEO
"글로벌 바이어들, 법적·정치적 리스크 있는 한국 기업
피해 일본으로 몰려간다는 사실 알아야”
"하루 빨리 기업 경쟁력 높이지 않으면
일본 장기 불황 전철 밟을 것"
딜로이트컨설팅재팬 CEO를 지낸 송수영 한국 딜로이트컨설팅 대표 내정자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 역시 자신을 ‘일본 100대 기업 대부분에 대한 컨설팅 경험이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송 대표는 “한국 기업인이 툭하면 국정감사에 올라 정치인들에게 호통을 듣고 검찰조사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글로벌 바이어들이 한국을 피해 일본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기업들이 하루라도 빨리 경쟁력을 다지지 않는다면 한국은 과거 일본 보다 더 어려운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경고다. 2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송 대표를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에 있는 딜로이트컨설팅 본사에서 만났다.
▷기업을 둘러싼 경제 상황을 진단한다면.
“글로벌 경기가 하강 추세로 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시한폭탄’일 수 있어요. 하지만 각국 정부가 금리 조정 등으로 사전 관리를 잘하고 있어 급격히 나빠지진 않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일본과 유럽은 경기 침체를 미리 겪으며 지금은 오히려 위기대응 능력이 커졌습니다.”
▷한국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성장률 같은 주요 경기지표는 좋지 않은 게 확실합니다. 분배나 고용 지표를 두고는 여당과 야당이 좋다, 안 좋다 싸우고 있죠. 정부와 정치권에선 기업을 돕겠다고 하면서도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지 않고 있어요. 그 사이에서 한국의 많은 기업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보유 자금은 많지만 차세대 먹거리를 찾지 못한 채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게 그 사례죠.”
▷한국과 일본의 기업 환경을 비교하면.
“일본에 20년간 머물면서 정권이 바뀐다고 특정 기업이 타깃이 돼 행정 조사 또는 검찰 수사를 당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기업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는 일은 보기 어렵죠. 일본에선 정치인들이 기업인을 존중합니다. ‘아베노믹스’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이후 일본은 기업 규제를 대거 풀어줬습니다.”
▷한국의 기업 환경은 많이 다르다고 느끼나요.
“한국은 정치와 기업이 맞물려 돌아가는 현상이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과 관련있는 기업인들이 툭하면 검찰 조사를 받아 포승줄에 묶이고 국회 국정감사에서 혼쭐이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 바이어들이 이런 모습을 보며 한국을 건너뛰고 일본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글로벌 바이어들은 잠재적이라도 법적 리스크나 도덕성 논란이 있는 기업과 거래하는 걸 극도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 기업과 계약서를 쓸 때 최대주주의 법적 위험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 보상조항(페널티)을 넣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반도체 등 한국 주력 산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법적, 정치적 위험까지 겹쳐 한국 기업들이 위기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현금을 곳간에만 쌓아둔 채 혁신은 더딘 느낌입니다. 일본은 과거 ‘잃어버린 20년’ 동안 밸류체인(가치사슬)을 혁신해왔습니다. 창조적 협업을 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었죠. 파나소닉, 소니, 교세라 등 과거 어려움을 겪은 기업들은 이제 혁신이 체질화돼 있습니다. 그 결과 경기와는 상관없이 탄탄한 사업구조를 갖추고 있어요. 반면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경기에 민감한 사업구조입니다. 미래를 충분히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죠.”
▷일본 경기는 어떻습니까.
“지금 일본에선 대학교 3학년생의 70%가 일자리를 확정합니다. 졸업반의 취업률은 120%에 달하죠. 대학교 졸업생 1인당 한 자리 이상의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뜻입니다. 경기는 뚜렷한 활황입니다. 그럼에도 일본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어렵다’고 말하죠. 일본인 특유의 몸을 낮추는 문화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나름대로 속도조절을 하며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장기침체를 극복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물론 기업 경쟁력을 되찾은 데 있죠. 일본 경영인들에게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을 물어보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만했다’는 겁니다. 일본의 기본적인 민족성은 근면, 성실입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고 창조적으로 일하는 것에는 소홀했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조직 문화가 강해서 오히려 개성 있고 창조적 사고를 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반성이 많았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리더, 조직원들이 많은 노력을 했죠. 그 덕에 인공지능(AI)과 로봇, 클라우드 컴퓨팅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도 과거 일본처럼 자만하고 있습니까.
“한국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맞았습니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죠. 그러나 자만하다가는 일본처럼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아니, 벌써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암흑기가 다가왔는지도 모릅니다. 기업 환경과 문화가 다 같이 변해야 합니다. 정치와 정부가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합니다.”
▷한국 기업의 혁신 방향을 조언한다면.
“무엇으로 돈을 벌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혁신과 조직문화가 함께 개선되지 않고 돈만 벌려고 하면 편법과 비리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권력과 손잡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죠. 과거엔 열심히만 달려왔지만 이제는 투명성과 도덕성을 갖춘 조직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서죠.”
▷일본에 비해 한국의 경쟁력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한국의 잠재력은 사람입니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각 국가 기업의 구성원들을 비교했을 때 한국인의 능력은 우수합니다. 특히 과감한 도전의식은 압도적입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최고죠.”
▷글로벌 무대에서 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주십시오.
“세계에서 외국인이 성공하기 쉬운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압도적으로 앞서가면 그때부터 다들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인의 저력을 믿으세요. 자신이 압도적으로 앞서갈 수 있는 한 분야를 찾아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보세요. 일본 기업과 일본에 있는 글로벌 기업은 한국인의 창의력과 경쟁력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송수영 대표는
일본 컨설팅업계에 직원으로 들어가 외국인 최초 사령탑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삼성전자와 소프트웨어기업 SAP 등을 거쳐 2009년 딜로이트컨설팅재팬에 입사했다. 딜로이트컨설팅재팬에서 10년 연속 프로젝트 수주 1위 자리를 꿰차며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딜로이트컨설팅재팬을 이끌며 업계 하위권에 머물던 회사를 1위(매출 기준)로 끌어올렸다.
■약력
△1963년 서울 출생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원 한일동시통역과 수료
△1989~1997년 삼성전자
△1999~2005년 SAP재팬
△2005~2007년 NTT 데이터 비즈니스 컨설팅
△2007~2009년 PwC컨설팅재팬
△2009~2019년 딜로이트컨설팅재팬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