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라 '무해의 방' 출간
중국 거쳐 남한으로 건너온
북한 여성의 험난한 삶 풀어내
탈북 사실을 숨긴 채 가정을 꾸리고 살던 무해는 ‘초로기 치매’ 진단을 받는다. 진단 후 생존 기간이 5~6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북한에서 자주 먹던 감자 전분으로 만든 농마국수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고선 홀로 남게 될 딸에게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억’들이 있었다. 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감정’들이 있었다”는 소설 속 문장이 보여주듯 무해는 자신 안에 기록이 되지 못한 기억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의 기근 속에서 존엄을 잃고 비참해진 사람들, 탈북을 결심하고 홀로 내달렸던 숲과 검은 압록강, 중국 브로커 집에서 팔리기만을 기다리며 지낸 시간, 장애가 있는 한족에게 팔려간 기억들이다.
소설은 ‘호적이 없는 인구’ 혹은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무해의 삶을 따라가면서 인간 존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북한의 비인간적인 삶과 인신매매가 성행하는 중국에서의 야만적인 경험을 통해 재난을 피해 국가를 탈출해야만 했던 개인에게 새겨진 폭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소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개인이 고통을 뛰어넘어 어떻게 타인을 믿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는 “고통 속에 있는 인물이 삶을 대면하는 태도에 집중했다”며 “전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지를 ‘초로기 치매’를 계기로 엮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무해의 방》은 치매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해의 기억은 사회와의 격리 또는 단절로 여겨지는 치매를 통해 비로소 타인과 공유된다. 소설은 치매가 만들어내는 비일상의 공간을 재현과 고백의 공간으로 바꿔놨다. 그 속에서 떠올린 고통스러운 기억마저 소중해지는 망각의 순간을 통해 삶의 역설과 마주치게 된다. 작가는 “기억을 다 잊어야 한다는 사실을 눈앞에 둔 무해가 기록을 통해 딸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자기 존재와 사투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광범위한 취재를 바탕으로 구성된 생생한 서사는 무해가 느낀 고통에 깊이 공감하게 하고, 나아가 고통을 넘어서려는 문학적 시도를 보여준다. 폭풍처럼 들이닥치는 기억 속에 주저앉은 무해를 붙드는 것은 결국 작은 공동체 속에서 이뤄지는 자신의 고백기도라는 점은 큰 울림을 준다.
심사를 맡았던 송종원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 도래할 가까운 미래의 꿈을 미리 연습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