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에 시민들이 공감하는 건 글귀를 통해 시대와 소통할 수 있어서죠.”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박치수 교보생명 상무(57·사진)는 “빌딩숲의 광고물과 네온사인에 시민들이 피로감을 느껴왔던 게 사실이다.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광화문글판을 보며 가슴 따뜻해짐을 전할 수 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광화문글판은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걸린 대형 글판이다. 30자 이내의 짧은 글귀를 가로 20m, 세로 8m의 현수막에 담아 시민들에게 공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글판은 봄·여름·가을·겨울 등 사계절에 한 번씩 바뀐다. 3일 설치된 광화문글판 여름편에는 여류 시인 김남조의 ‘좋은 것’(읽다 접어둔 책과/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의 글귀가 적혔다.

글귀는 작가, 교수, 언론인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문안선정위가 정한다. 교보생명에서는 박 상무가 유일하게 참여한다. 지금까지 정호승 시인, 한강 소설가, 유정호 평론가 등이 선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시민들의 공모작과 선정위원들의 추천작을 놓고 토론과 투표를 거쳐 글귀를 최종 선정한다.

“글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야 합니다. 3개월간 걸리는 만큼 울림과 여운이 필요하죠. 대부분이 버스 탄 채로, 혹은 길을 지나가면서 보기 때문에 가독성도 중요합니다. 제 역할은 전문가들이 놓칠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이죠. 정치색이 강한 내용은 최대한 피하려 합니다.”

광화문글판은 1991년 고(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우리 모두 함께 뭉쳐/경제활력 다시 찾자’는 짧은 메시지를 던졌다. 박 상무는 “광화문의 상징성을 살리고 청소년이 많이 찾는 교보문고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대형 글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뒤 신용호 창립자는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광화문글판을 수놓은 글귀는 90여 편에 이른다. 공자, 헤르만 헤세, 서정주 등 60여 명에 이르는 명사들의 작품이 실렸다. 2015년 광화문글판 25주년을 기념해 시행된 설문조사에서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자세히 보아야 이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광화문글판의 다음 30년은 어떤 모습일까. 박 상무는 “대학생이 참여하는 디자인 공모전을 여는 등 새로운 시대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며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면서 디지털 시대의 표현 방식을 도입하는 방안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