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치열함은 고무판을 잘라 먹선처럼 배열한 ‘고무산수’, 뽀글거리는 라면으로 풍광을 표현한 ‘라면산수’, 칠판에 그린 ‘분필산수’에 이어 2000년 이후 ‘기억의 풍경’ ‘흐르는 풍경’ ‘채집된 산수’로 확장됐다. 그동안 화첩만 500여 권, 초벌 그림도 1만여 점에 달한다. 지난해 9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두 달 동안 자동차에 몸을 싣고 약 1만㎞를 질주하며 그랜드캐니언과 세도나, 요세미티,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대자연을 채집해 화폭에 옮겼다. 이름도 ‘추니 박’으로 바꾸고 국제무대로 보폭을 넓히겠다는 결기를 다졌다. 지난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트페어 ‘아시아 잉크페인팅 특별전’에 참가해 미국 서부 풍경을 담은 34m 대작으로 국제 미술계의 찬사도 받아냈다.
서울 신문로 갤러리 마리에서 5일 개막한 ‘낯선 이국 풍경- 시간을 읽는 시선’ 전은 미국과 호주 풍경을 한국의 전통 필법으로 되살린 박씨의 작품을 통해 우리 미술의 혁신을 증명해 보이는 자리다. 서양화의 아류를 뛰어넘어 이국 땅의 곰삭은 존재와 시간을 화폭에 풀어낸 근작 30여 점을 걸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번 전시는 미국과 호주의 자연에 담긴 기(氣)를 동양 필법으로 잡아내 지금껏 서양미술에 가려진 한국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한국화의 기본 지침인 기운생동(氣韻生動·멋), 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 수류부채(隨類賦彩·채색),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 전모이사(傳模移寫·모방과 창작)를 따르며 서양의 재료를 활용했습니다.”
융합 산수의 기발한 기법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굵고 검은 먹과 원색의 아크릴 물감, 목탄, 파스텔 등 재료를 거침없이 사용하며 인간의 본능과 욕망, 사회 문제, 가족, 삶의 풍경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때로는 자유분방하게, 때로는 절박한 심정으로 화폭에 쏟아냈다.
작가는 최근 검은색 필선을 덮고 있는 화려한 원색을 사용해 변화를 시도했다. 필선 못지않게 색면이 전면에 등장하고, 수묵과 채색의 과감한 조합, 필선과 색면의 어울림에 주안점을 뒀다. “검은 선과 점이 색면과 결합되면서 자연과 시간에 대한 해석의 깊이가 확장됐어요. 색선과 색면을 집어넣었더니 풍경들이 더 살아 움직이는 것 같더군요.”
실제로 박씨의 근작은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중과 묘사를 피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청아한 빛줄기를 담아냈다. 산수 자체보다는 정경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역점을 뒀다. 푸르름이 침잠한 오리건주 소나무 숲과 붉은 노을이 물든 그랜드캐니언 등에서 시정과 화흥(畵興)이 함께 풍겨 나온다. 맑은 색감과 단순한 구도는 서양화이면서도 동양화의 청아한 맛을 더해준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