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 '독박' 쓸라…"국회도 모든 문의는 문서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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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 대화록 유출'에 얼어붙은 공직사회
보좌관 - 공무원 기싸움
靑 감찰반에 걸리면 우리만 피해
보좌관 - 공무원 기싸움
靑 감찰반에 걸리면 우리만 피해
“자료를 주면 언론에 유출하고, 거절하면 ‘국회의원 우습게 본다’고 꾸짖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한 경제부처 국장)
한·미 정상 간 대화록 유출로 외교관 K씨가 파면된 이후 공직사회가 급속히 움츠러들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부딪치면 담당 공무원이 ‘독박’을 쓰는 구조인 데다 K씨 파면 이후 공직 감찰이 강화된 탓이다. 공직사회의 몸사리기가 더 심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잦아진 국회·정부 간 기싸움
최근 국회 의원회관에선 비공개 자료를 달라는 보좌진과 줄 수 없다는 공무원의 기싸움이 잦아졌다. 한 경제부처는 아예 “정식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다”는 대응 원칙까지 정했다. 정식으로 자료 요청을 받아 문서를 작성한 뒤 내부 결재라인을 거쳐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국회의 힘이 세지면서 국회 보좌관이 중앙부처 국장급 고위 간부를 ‘호출’해 자료 제공을 윽박지르던 연초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한 보좌관은 “간단한 배경 설명도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다”며 “외교, 안보 라인이나 기획재정부 등 주요 부처의 힘만 세질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 권한은 헌법 61조와 국회법 128조에 명시돼 있다. 국정 현안에 대해 의원들이 정부에 서류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자료 제출 요구 범위가 모호해 ‘업무 협조’와 ‘기밀 유출’의 경계선상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공직 감찰 강화에 텔레그램으로 ‘대피’
정보 유출 사건 이후 공무원들 사이에선 대대적인 공직 감찰이 일어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한 경제부처 국장급 공무원은 “외교부에서 시작해 기밀이나 주요 정책을 다루는 부처를 중심으로 감찰이 이뤄질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며 “의심을 살 만한 문자를 지우거나 휴대폰을 바꾸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가 외교부를 대상으로 보안 조사를 벌인 것만 최소 10차례 이상으로 전해졌다.
기밀이나 정보 유출로 괘씸죄에 걸리면 ‘별건 조사’도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 최근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감찰을 받다가 카카오톡 대화록에 남은 다른 내용이 문제가 돼 징계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공무원들의 ‘대응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기밀을 많이 다루는 부처는 더 이상 ‘카카오톡 대화방’을 회의 플랫폼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외국계 회사가 개발한 보안 메신저 텔레그램을 이용한다. 대화 내용을 자동 삭제할 수 있는 데다 서버가 해외에 있어 사정기관 조사에도 안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외교관 K씨가 카카오톡의 통화 기능인 ‘보이스톡’을 사용하다 감찰에 걸린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친분이 있는 지인을 대할 때조차 텔레그램을 이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국방부의 한 고위 간부는 “각종 대화와 대외비 자료, 보고서 초안 등의 정보를 텔레그램으로 유통하는 게 불안하지만 청와대 특감반에 걸리는 게 개인적으로 더 큰 문제여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의원은 당이 보호, 공무원은?
문제가 터지면 공무원만 모든 책임을 떠안는 데 대한 불만도 상당하다. K씨 파면을 촉발시킨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면책특권으로 별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검찰에 고발됐지만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당 차원에서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반면 공무원들은 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작년 10월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3기 신도시 신규택지 자료 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 의원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과천이 포함되자 택지개발 후보지를 사전 공개했다. 신 의원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 담당자를 불러 후보지를 전해들으며 “외부에 절대 유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결국 LH 직원과 공무원 등에게 문책과 수사의뢰 조치가 내려졌다. 신 의원은 상임위를 환경노동위원회로 옮겼을 뿐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한배를 탄 여당이 얼어붙는 ‘공심(公心)’도 모르고 여전히 적폐 청산만 외친다고 하소연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기재부에 자료를 요청해도 답이 없다. 집권 중반부가 되니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반면 경제부처에선 “공무원들이 왜 정치권을 불신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반응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성과는 자기들이 발표하고, 문제가 생기면 부처에 떠넘기지 않느냐”며 “공직사회가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달라”고 말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한·미 정상 간 대화록 유출로 외교관 K씨가 파면된 이후 공직사회가 급속히 움츠러들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부딪치면 담당 공무원이 ‘독박’을 쓰는 구조인 데다 K씨 파면 이후 공직 감찰이 강화된 탓이다. 공직사회의 몸사리기가 더 심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잦아진 국회·정부 간 기싸움
최근 국회 의원회관에선 비공개 자료를 달라는 보좌진과 줄 수 없다는 공무원의 기싸움이 잦아졌다. 한 경제부처는 아예 “정식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다”는 대응 원칙까지 정했다. 정식으로 자료 요청을 받아 문서를 작성한 뒤 내부 결재라인을 거쳐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국회의 힘이 세지면서 국회 보좌관이 중앙부처 국장급 고위 간부를 ‘호출’해 자료 제공을 윽박지르던 연초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한 보좌관은 “간단한 배경 설명도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다”며 “외교, 안보 라인이나 기획재정부 등 주요 부처의 힘만 세질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 권한은 헌법 61조와 국회법 128조에 명시돼 있다. 국정 현안에 대해 의원들이 정부에 서류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자료 제출 요구 범위가 모호해 ‘업무 협조’와 ‘기밀 유출’의 경계선상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공직 감찰 강화에 텔레그램으로 ‘대피’
정보 유출 사건 이후 공무원들 사이에선 대대적인 공직 감찰이 일어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한 경제부처 국장급 공무원은 “외교부에서 시작해 기밀이나 주요 정책을 다루는 부처를 중심으로 감찰이 이뤄질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며 “의심을 살 만한 문자를 지우거나 휴대폰을 바꾸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가 외교부를 대상으로 보안 조사를 벌인 것만 최소 10차례 이상으로 전해졌다.
기밀이나 정보 유출로 괘씸죄에 걸리면 ‘별건 조사’도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 최근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감찰을 받다가 카카오톡 대화록에 남은 다른 내용이 문제가 돼 징계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공무원들의 ‘대응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기밀을 많이 다루는 부처는 더 이상 ‘카카오톡 대화방’을 회의 플랫폼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외국계 회사가 개발한 보안 메신저 텔레그램을 이용한다. 대화 내용을 자동 삭제할 수 있는 데다 서버가 해외에 있어 사정기관 조사에도 안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외교관 K씨가 카카오톡의 통화 기능인 ‘보이스톡’을 사용하다 감찰에 걸린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친분이 있는 지인을 대할 때조차 텔레그램을 이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국방부의 한 고위 간부는 “각종 대화와 대외비 자료, 보고서 초안 등의 정보를 텔레그램으로 유통하는 게 불안하지만 청와대 특감반에 걸리는 게 개인적으로 더 큰 문제여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의원은 당이 보호, 공무원은?
문제가 터지면 공무원만 모든 책임을 떠안는 데 대한 불만도 상당하다. K씨 파면을 촉발시킨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면책특권으로 별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검찰에 고발됐지만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당 차원에서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반면 공무원들은 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작년 10월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3기 신도시 신규택지 자료 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 의원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과천이 포함되자 택지개발 후보지를 사전 공개했다. 신 의원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 담당자를 불러 후보지를 전해들으며 “외부에 절대 유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결국 LH 직원과 공무원 등에게 문책과 수사의뢰 조치가 내려졌다. 신 의원은 상임위를 환경노동위원회로 옮겼을 뿐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한배를 탄 여당이 얼어붙는 ‘공심(公心)’도 모르고 여전히 적폐 청산만 외친다고 하소연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기재부에 자료를 요청해도 답이 없다. 집권 중반부가 되니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반면 경제부처에선 “공무원들이 왜 정치권을 불신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반응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성과는 자기들이 발표하고, 문제가 생기면 부처에 떠넘기지 않느냐”며 “공직사회가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달라”고 말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