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2001년 7월 19일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고 있다.  한경DB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2001년 7월 19일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고 있다. 한경DB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7세.

이 여사는 지난 3월부터 병세가 악화해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 왔다. 가족과 동교동계 인사들은 4월 장남이자 의붓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을 때도 이 여사의 병세 악화를 염려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이낙연 국무총리,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등이 이 여사의 임종 직전 병원을 찾았다. 정치권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독자적인 여성·정치활동을 해온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애도가 쏟아지고 있다.

엘리트 여성에서 정치인의 아내로

이 여사는 1922년 서울에서 6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 형편 덕에 해방 전후로 미국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학문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이화여전 문과,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램버스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엘리트 여성운동가였다.

촉망받는 여성운동가였던 이 여사의 삶은 1962년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 후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이 여사는 부인과 사별한 김 전 대통령과 정치 이야기를 하며 교감을 키웠다. 유학과 사회생활로 해박한 지식을 쌓은 이 여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을 지닌 김 전 대통령은 자주 만나 대화하며 서로를 향한 호감을 키웠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이유를 묻는 지인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잘생겼기 때문”이라고 하곤 했다. 그는 평전에서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며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회고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노모와 전처 소생의 아들 둘을 둔 무일푼의 정치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정권의 탄압으로 감옥과 연금 생활, 타국 망명 생활 등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낼 때 이 여사는 그를 지극히 보필하며 일생을 보냈다.
이희호 여사가 2012년 6월 11일 서울 신촌로 김대중도서관에서 당시 이해찬 민주통합당 신임 대표의 예방을 받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경DB
이희호 여사가 2012년 6월 11일 서울 신촌로 김대중도서관에서 당시 이해찬 민주통합당 신임 대표의 예방을 받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경DB
DJ의 가장 가까운 비판자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 동지이자 가장 가까운 비판자 그리고 조언자 역할을 홀로 해냈다.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과 납치 사건,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 가택연금 등 군사정권 내내 이어진 감시와 탄압을 버텨냈다. 1980년 내란음모 사건 때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인 구명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70대의 고령에도 ‘퍼스트레이디’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정책에 자신의 전공 분야를 살려 여성 관련 대책이 들어가게끔 도왔고 이는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여성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정부 당시 여성의 공직 진출 확대를 비롯해 여성계 인사들이 정계 진출의 문호를 넓히는 데도 이 여사의 역할이 숨어 있었다. 한명숙 전 총리와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미경 한국국제협력단 이사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등이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에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영부인으로는 최초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별세 이후에도 동교동계와 재야 정치인들의 거목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타계 직전까지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대북 관계 형성에 힘써왔다. 발인은 14일 오전 6시 신촌세브란스병원.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김소현 기자 alp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