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통판사' 천종호…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맡은 박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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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열전 (22회) '천운'이 도운 연수원 26기
1995년 6월 29일. 그날 오후 사법연수원 26기(1995년 입소) 290여명은 가재환 연수원장으로부터 법조윤리 교육을 받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원장에게 사정이 생기자 모두들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갔다. 대체 프로그램으로 국악공연 관람이 잡히면서다.
지금은 사법연수원이 경기 고양시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별관 자리에 있었다. 별 생각없이 공연을 보고 연수원으로 돌아온 26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길건너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26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연수원생들이 가까이에 있는 삼풍백화점을 수시로 다녔기 때문에 만약 예술의 전당에 가지 않았다면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며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 건물에는 사고수습 지휘본부가 들어섰다. 그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응급 구조현장과 울부짖는 피해가족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했다. 그들은 구조대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나눠줬고 자발적으로 헌혈을 했다. 같은 해 7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부당한 처사라며 동기회 이름으로 성명을 내기도 했다. 쉰살 안팎의 이들 연수원 26기는 법원과 검찰, 변호사업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견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문유석·도진기
연수원 26기에는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스타’들이 많다. ‘호통 판사’ ‘비행청소년의 대부’로 불리는 천종호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대표적이다. 천 부장판사는 2010년 창원지법 소년부에 부임뒤 8년 동안 소년재판을 전담했다. 그는 2013년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가해 학생과 부모에게 호통을 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책을 써서 받은 인세 전액을 비행청소년을 위해 기부하고 위기청소년들로 구성된 축구팀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천 부장판사는 본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가정 형편 문제 등으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연민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천 부장판사는 정년 퇴직까지 소년재판만 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지난해 법원의 순환근무 원칙에 따라 부산지법 형사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문유석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2017년 한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20·30대 젊은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문 부장판사는 칼럼에서 “(중장년층에게) ‘우리 때는 말야’ 하지 마라. 당신 때였으니까 그 학점 그 스펙으로 취업한 거다”고 일갈하며 이른바 ‘꼰대질’을 일삼는 기성세대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스 함무라비’,‘개인주의자 선언’ 등의 베스트셀러도 남겼다. 문 부장판사는 연수원 시절부터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 났다. 하이텔 천리안 등 게시판에 신변잡기 성격의 글을 올려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는 ‘미투(Me Too·나도 고발했다)’ 바람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 성폭력이 일어난다면 나부터 침묵하지 않겠다는 뜻의 ‘미 퍼스트(Me First)’ 운동을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2017년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민간에 나온 도진기 변호사는 추리소설 작가다. 판사로 일하던 2010년 작가로 데뷔해 법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만 8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김동성 변호사는 2000년대 초반 생활 속 법률 문제를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에 고정패널로 출연해 일반인들에게 친숙해졌고 18대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양승태 1심 재판장 맡은 박남천
법원과 검찰에서는 중책을 맡고 있는 26기들이 많다. 이미선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올해 헌재에 입성해 역사상 처음으로 ‘3명의 여성 헌법재판관’ 시대를 열었다. 서울대 출신 중년 남성이 독점하던 헌법재판관에 지방대 출신 40대 여성이 임명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 재판관은 법원 내 노동법 전문가로 통했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이 재판관 부부가 35억원 상당의 주식을 보유한 사실이 알려져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은 26기가 이끌고 있다. 박남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1심 재판장이다. 윤종섭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심 재판을 맡았다. 이들은 판사가 된 이후 법원행정처 등에서 근무한 경험 없이 줄곧 재판만 해왔다. 박 부장판사는 다소 깐깐한 성격의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윤 부장판사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경희대를 졸업한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과 대학 후배다. 지난달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맡아 발부 결정을 내린 신종열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이들과 동기다.
26기에선 ‘여성 최초’ 타이틀도 다수 나왔다. 이숙연 서울고법 판사는 2011년 여성 최초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가 됐다. 국내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전담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와 대법관 등 고위직으로 가는 필수코스로 여겨지는 자리다. 포항공대 수석 졸업자인 이 판사는 포항제철에서 일하던 중 거리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혼자서 노동법을 익히며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치러낸 뒤 고려대 법대에 편입해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국내 최대 지방검찰청인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선 지난해 첫 여성 차장검사가 탄생했다. 이노공 서울중앙지검 4차장이다. 이 차장검사는 조희진(연수원 19기) 이영주(22기) 검사장에 이어 ‘여성 검사장 3호’ 유력 주자로 꼽힌다. 이 차장과 이숙연 판사는 ‘연수원 CC(캠퍼스 커플)’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 차장은 송종호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와, 이 판사는 조형섭 율우 변호사와 각각 연수원 동기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검찰에선 박찬호 서울중앙지검 2차장도 유명하다. 연수원 시절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 같았다”는 평을 들어온 박 차장은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수사팀장을 맡아 원세훈 전 원장 등을 불법사찰 등 혐의로 기소했다. 문홍성 대검찰청 선임검찰연구관과 이수권 수원지검 2차장 등도 검찰 내 ‘에이스’로 꼽힌다.
외국기업 자문 전문 추원식
국회에는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연수원을 마치고 인권변호사 길을 걸었던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있다. ‘386 대표주자’로 민주당 내 소장 개혁파로 꼽히던 송 의원은 인천시장을 지낸 4선 중진이 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도 26기다. 고(故) 김명주 전 의원(17대 국회)과 김동성 변호사(18대 국회)도 ‘금배지파’다.
로펌업계에서는 잘 나가는 26기가 즐비하다. 중국 회사인 크리스탈신소재, 헝셩그룹, 로스웰 등의 한국 증시 상장 자문을 맡은 추원식 광장 변호사는 외국기업 자문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뽐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고등법원 공정거래전담부 근무 경험이 있는 윤정근 율촌 변호사는 공정거래 분야 전문가로 통한다. 지식재산권(IP) 분야에선 김지현 태평양 변호사가, 조세 분야에선 하상혁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가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인수합병(M&A) 전문인 송창현 세종 변호사는 CJ대한통운가 베트남 1위 물류기업 제마뎁을 인수했을 때 자문을 담당했다. 부동산 경매 분야에선 최광석 득아 변호사가 입지를 굳혔다.
연수원 26기 수석은 김앤장 변호사로 활동하다 후학 양성의 길을 가고 있는 천경훈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가 차지했다. 26기 동기회 회장은 강성만 변호사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
지금은 사법연수원이 경기 고양시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별관 자리에 있었다. 별 생각없이 공연을 보고 연수원으로 돌아온 26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길건너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26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연수원생들이 가까이에 있는 삼풍백화점을 수시로 다녔기 때문에 만약 예술의 전당에 가지 않았다면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며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 건물에는 사고수습 지휘본부가 들어섰다. 그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응급 구조현장과 울부짖는 피해가족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했다. 그들은 구조대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나눠줬고 자발적으로 헌혈을 했다. 같은 해 7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부당한 처사라며 동기회 이름으로 성명을 내기도 했다. 쉰살 안팎의 이들 연수원 26기는 법원과 검찰, 변호사업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견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문유석·도진기
연수원 26기에는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스타’들이 많다. ‘호통 판사’ ‘비행청소년의 대부’로 불리는 천종호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대표적이다. 천 부장판사는 2010년 창원지법 소년부에 부임뒤 8년 동안 소년재판을 전담했다. 그는 2013년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가해 학생과 부모에게 호통을 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책을 써서 받은 인세 전액을 비행청소년을 위해 기부하고 위기청소년들로 구성된 축구팀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천 부장판사는 본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가정 형편 문제 등으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연민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천 부장판사는 정년 퇴직까지 소년재판만 하고 싶다고 밝혔지만 지난해 법원의 순환근무 원칙에 따라 부산지법 형사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문유석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2017년 한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20·30대 젊은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문 부장판사는 칼럼에서 “(중장년층에게) ‘우리 때는 말야’ 하지 마라. 당신 때였으니까 그 학점 그 스펙으로 취업한 거다”고 일갈하며 이른바 ‘꼰대질’을 일삼는 기성세대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스 함무라비’,‘개인주의자 선언’ 등의 베스트셀러도 남겼다. 문 부장판사는 연수원 시절부터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 났다. 하이텔 천리안 등 게시판에 신변잡기 성격의 글을 올려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는 ‘미투(Me Too·나도 고발했다)’ 바람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 성폭력이 일어난다면 나부터 침묵하지 않겠다는 뜻의 ‘미 퍼스트(Me First)’ 운동을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2017년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민간에 나온 도진기 변호사는 추리소설 작가다. 판사로 일하던 2010년 작가로 데뷔해 법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만 8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김동성 변호사는 2000년대 초반 생활 속 법률 문제를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에 고정패널로 출연해 일반인들에게 친숙해졌고 18대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양승태 1심 재판장 맡은 박남천
법원과 검찰에서는 중책을 맡고 있는 26기들이 많다. 이미선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올해 헌재에 입성해 역사상 처음으로 ‘3명의 여성 헌법재판관’ 시대를 열었다. 서울대 출신 중년 남성이 독점하던 헌법재판관에 지방대 출신 40대 여성이 임명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 재판관은 법원 내 노동법 전문가로 통했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이 재판관 부부가 35억원 상당의 주식을 보유한 사실이 알려져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은 26기가 이끌고 있다. 박남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1심 재판장이다. 윤종섭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심 재판을 맡았다. 이들은 판사가 된 이후 법원행정처 등에서 근무한 경험 없이 줄곧 재판만 해왔다. 박 부장판사는 다소 깐깐한 성격의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윤 부장판사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경희대를 졸업한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과 대학 후배다. 지난달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맡아 발부 결정을 내린 신종열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이들과 동기다.
26기에선 ‘여성 최초’ 타이틀도 다수 나왔다. 이숙연 서울고법 판사는 2011년 여성 최초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가 됐다. 국내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전담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와 대법관 등 고위직으로 가는 필수코스로 여겨지는 자리다. 포항공대 수석 졸업자인 이 판사는 포항제철에서 일하던 중 거리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혼자서 노동법을 익히며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치러낸 뒤 고려대 법대에 편입해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국내 최대 지방검찰청인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선 지난해 첫 여성 차장검사가 탄생했다. 이노공 서울중앙지검 4차장이다. 이 차장검사는 조희진(연수원 19기) 이영주(22기) 검사장에 이어 ‘여성 검사장 3호’ 유력 주자로 꼽힌다. 이 차장과 이숙연 판사는 ‘연수원 CC(캠퍼스 커플)’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 차장은 송종호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와, 이 판사는 조형섭 율우 변호사와 각각 연수원 동기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검찰에선 박찬호 서울중앙지검 2차장도 유명하다. 연수원 시절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 같았다”는 평을 들어온 박 차장은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수사팀장을 맡아 원세훈 전 원장 등을 불법사찰 등 혐의로 기소했다. 문홍성 대검찰청 선임검찰연구관과 이수권 수원지검 2차장 등도 검찰 내 ‘에이스’로 꼽힌다.
외국기업 자문 전문 추원식
국회에는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연수원을 마치고 인권변호사 길을 걸었던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있다. ‘386 대표주자’로 민주당 내 소장 개혁파로 꼽히던 송 의원은 인천시장을 지낸 4선 중진이 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도 26기다. 고(故) 김명주 전 의원(17대 국회)과 김동성 변호사(18대 국회)도 ‘금배지파’다.
로펌업계에서는 잘 나가는 26기가 즐비하다. 중국 회사인 크리스탈신소재, 헝셩그룹, 로스웰 등의 한국 증시 상장 자문을 맡은 추원식 광장 변호사는 외국기업 자문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뽐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고등법원 공정거래전담부 근무 경험이 있는 윤정근 율촌 변호사는 공정거래 분야 전문가로 통한다. 지식재산권(IP) 분야에선 김지현 태평양 변호사가, 조세 분야에선 하상혁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가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인수합병(M&A) 전문인 송창현 세종 변호사는 CJ대한통운가 베트남 1위 물류기업 제마뎁을 인수했을 때 자문을 담당했다. 부동산 경매 분야에선 최광석 득아 변호사가 입지를 굳혔다.
연수원 26기 수석은 김앤장 변호사로 활동하다 후학 양성의 길을 가고 있는 천경훈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가 차지했다. 26기 동기회 회장은 강성만 변호사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