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에서 발생한 유조선 피격사건을 두고 미국과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공격 주체는 이란’이라는 미국 측 주장에 일본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동안 일본은 주요 국제문제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춰 왔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중재 외교’를 표방하며 이란을 방문한 시점에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섣불리 어느 한쪽 편을 들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이 베트남전의 빌미가 됐던 ‘통킹만 사건’의 21세기 버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美와 불협화음 내는 日

16일 도쿄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일어난 유조선 피격 사건과 관련, “이란이 공격에 관여했다”는 미국 설명에 동조하지 않고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언론들은 “(유조선 공격을 이란이 벌였다는) 미국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 내에선 미국이 주장하는 ‘이란 관여설’은 추측일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13일 유조선 피격이 ‘이란 책임’이라고 단언한 이후 복수의 외교 경로를 통해 “국제사회가 납득할 수 있도록 이란 소행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해주지 않으면 일본으로선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피격을 당한 유조선을 운영하는 고쿠가산교 역시 “복수의 승무원이 유조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봤다”고 전하며 피격이 기뢰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미국 주장을 부인했다.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가 야심차게 이란을 방문한 시점에 유조선 공격사건이 터지면서 운신의 폭이 크게 좁아진 상황이다. 성급하게 이란에 공격책임을 물을 경우 중동 긴장완화를 목표로 이란을 방문했던 의미가 흔들릴 수 있다. 만약 이란이 유조선을 공격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아베 총리는 이란의 기만전술에 놀아난 꼴이 돼 ‘외교 실패’에 대한 거센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연관설을 재차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폭발하지 않은 부착식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유조선에 접근한 배와 미폭발 기뢰가 이란의 것이라는 증거가 포착됐다”고 말했다.

‘제2의 통킹만’ 우려도

일본에선 베트남전 개전 명분이 됐던 ‘통킹만 사건’이나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사라예보 사건’, 일본 군부가 중일전쟁을 벌이는 데 활용됐던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 등이 때아닌 관심을 받고 있다. 우발적인 국지 충돌이 호전적인 정치세력에 이용돼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하는 빌미가 된 점이 최근 사태와 비슷한 면이 많아서다. 특히 실체적 진실이 모호한 가운데 미국이 긴장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통킹만 사건을 떠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 온라인매체인 버즈피드뉴스는 “긴장이 고조되는 호르무즈 해협의 첫 희생자는 진실일지 모른다”며 ‘통킹만 사건’에 빗대 이번 사건의 책임을 이란에 모는 것이 미국 측 음모일 수 있다는 시각을 내비쳤다. 또 다른 매체 블로고스도 “유조선 피격 사태가 제2의 통킹만 사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64년 8월 미국 군함이 베트남 근해 통킹만 공해상에서 공격을 받은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데 직접적인 명분이 됐다. 당시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 정권의 공격이라고 단정하고 항공모함을 동원해 북베트남에 보복 폭격했다. 그러나 1971년 뉴욕타임스가 폭로한 펜타곤 보고서에 따르면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려고 조작한 것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