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아무리 나빠도 한류가 좋아요"…日 3차 한류의 현장을 가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건너편은 사람이 너무 많아 지나가기 힘드니까 이쪽 편으로 가시죠.”
일본 도쿄에서 20년 가까이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이승민 신오쿠보어학원 원장은 2차선 도로의 반대쪽 보도로 기자 일행을 이끌었다. 반대쪽도 인파를 헤치고 나가야 하긴 마찬가지였다. 평일인 지난 5일 오후 도쿄 신주쿠구 신오쿠보의 풍경이다.
“전철역 빠져나오는데만 15분”
신오쿠보는 한국식당과 식료품 가게가 몰려 있어 ‘코리아타운’으로 불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어 2004년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 두 번째 한류를 일으킨 이후 일본은 물론 한국 미디어로부터도 여러 차례 조명을 받았다. 한류팬들로 붐비던 신오쿠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유출사고가 일어나고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관계가 급랭하면서 쇠락했다. 한국인 가게 가운데 3분의 1이 신오쿠보를 떠났다. 남은 가게의 매출도 한창 때의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1만2000명에 달했던 한국인 숫자는 1만명 이하로 줄었다. 그새 중국인들은 1만3000명으로 늘어 신오쿠보의 최다 계파가 됐다. 신오쿠보역 동쪽 지역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식당과 가게가 들어서면서 ‘아시아 타운’이 됐다.
생기를 잃어가던 신오쿠보에 ‘제3의 한류’가 불어닥친 건 2017년께. 2차 한류가 한국 드라마의 힘이었다면 3차 한류의 발원지는 방탄소년단(BTS) 엑소(EXO) 등 케이팝(K-Pop) 스타들이었다. ‘도쿄의 한국’을 체험하려는 한류팬이 몰려들면서 출구가 하나뿐인 작은 역 신오쿠보역(야마노테선)은 전차가 도착할 때마다 기능이 마비될 정도다. 15년째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이윤(43세)씨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한류팬들 덕분에 지난 주말에는 플랫폼에서 신오쿠보역을 빠져 나오는데만 15분이 걸렸다”고 말했다. 3차 한류의 풍경이 과거와 전혀 다른 이유는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의 평균 연령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 한류’ 당시 신오쿠보를 찾은 이들은 30~50대 여성이었다. 지금은 케이팝에 열광하는 10대 중고교생과 20대 초반 여성들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각양각색의 교복을 입은 중고교생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어 학원가를 연상케 했다. 30~50대에 비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보니 3차 한류팬의 씀씀이는 크지 않은 편. 드라마 한류팬이 1인당 4000엔(약 4만원) 정도를 썼다면 케이팝 한류팬은 2000엔 정도를 쓴다. 이승민 원장은 “객단가는 절반이지만 훨씬 많은 이들이 찾기 때문에 한국 식당과 가게들이 더 반긴다”고 했다.
현재 신오쿠보의 최고 명물은 치즈핫도그다. 젊은이들의 거리 하라주쿠의 명물이 프라페라면 이 곳에서는 치즈핫도그를 맛보지 않으면 신오쿠보를 방문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가는 한류팬들은 어김없이 치즈 핫도그를 들었고, 저마다 원조를 내세우는 핫도그 가게 앞은 어김없이 길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치즈핫도그는 한국에서는 생소하다. 어지간한 음식에 치즈나 마요네즈를 뿌려 먹을 정도로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춰 탄생했다. 2차 한류 당시 치즈를 넣어 대박을 친 치즈닭갈비의 공식이 핫도그에도 통한 셈이다. 중고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메뉴이기도 하다.
한류팬 주류가 정치적 영향 안받는 10~20대로 변화
신오쿠보의 좁은 골목들 가운데 한류팬들의 필수 탐방 코스인 ‘이케멘도오리’도 한국 특유의 문화가 일본 현지에서 통한 ‘토착 한류’다. ‘얼짱의 거리’라는 뜻의 이케맨도오리는 한국 식당들이 몰려있는 골목. 호객행위는 일본의 유흥가에서도 흔하지만 이곳 한국 식당들은 케이팝 스타처럼 젊고 잘생긴 한국 직원들을 집중 투입해 신오쿠보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이윤 씨는 “방송에 데뷔는 못했지만 신주쿠 지역 유흥가에서는 나름 유명세를 타는 ‘신주쿠 케이팝 아이돌 그룹’도 있다”고 말했다. 신오쿠보의 한국 사회가 3차 한류를 반기는 건 이번 만큼은 반짝하고 말 유행이 아니라는 기대 때문이다. 3차 한류의 주류가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10~20대 젊은 층이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한일 관계가 나빠지자 발걸음을 끊었던 중년 한류팬과 달리 10~20대들은 양국 관계가 아무리 악화돼도 신오쿠보를 꾸준히 찾는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10~20대들이 한류의 주소비층으로 자리잡으면서 ‘한국인이 더 많이 찾는 일본’의 양상도 변하고 있다.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은 “올들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10%로 준 반면 방한 일본인 숫자는 꾸준히 늘어서 구도가 변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700만명,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350여만명이었다. 아직까지 400만명을 넘었던 드라마 한류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이 나빠진 건 사실이다. 일본 서점가에는 혐한 서적이 앞다퉈 진열되고 포털 사이트에 ‘혐한’을 검색하면 60개 이상의 결과물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 전체 인구 가운데 혐한론자는 1%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표면적인 현상만 놓고 일본 사회의 전체 분위기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수치다. 나카지마 겐타로 요미우리신문 기자는 “현재 아베 정부는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힘을 쏟고 있지만 일본과의 무역규모가 10배, 인력교류는 7배 더 많은 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일본의 젊은 층과 치즈핫도그, 이케멘도오리 등으로 대표되는 토착 한류가 만남을 이어가는 한 한일관계가 비관적이지만은 않음을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한류팬들로 가득한 신오쿠보 거리가 증언하고 있었다.
도쿄=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20년 가까이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이승민 신오쿠보어학원 원장은 2차선 도로의 반대쪽 보도로 기자 일행을 이끌었다. 반대쪽도 인파를 헤치고 나가야 하긴 마찬가지였다. 평일인 지난 5일 오후 도쿄 신주쿠구 신오쿠보의 풍경이다.
“전철역 빠져나오는데만 15분”
신오쿠보는 한국식당과 식료품 가게가 몰려 있어 ‘코리아타운’으로 불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어 2004년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 두 번째 한류를 일으킨 이후 일본은 물론 한국 미디어로부터도 여러 차례 조명을 받았다. 한류팬들로 붐비던 신오쿠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유출사고가 일어나고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관계가 급랭하면서 쇠락했다. 한국인 가게 가운데 3분의 1이 신오쿠보를 떠났다. 남은 가게의 매출도 한창 때의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1만2000명에 달했던 한국인 숫자는 1만명 이하로 줄었다. 그새 중국인들은 1만3000명으로 늘어 신오쿠보의 최다 계파가 됐다. 신오쿠보역 동쪽 지역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식당과 가게가 들어서면서 ‘아시아 타운’이 됐다.
생기를 잃어가던 신오쿠보에 ‘제3의 한류’가 불어닥친 건 2017년께. 2차 한류가 한국 드라마의 힘이었다면 3차 한류의 발원지는 방탄소년단(BTS) 엑소(EXO) 등 케이팝(K-Pop) 스타들이었다. ‘도쿄의 한국’을 체험하려는 한류팬이 몰려들면서 출구가 하나뿐인 작은 역 신오쿠보역(야마노테선)은 전차가 도착할 때마다 기능이 마비될 정도다. 15년째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이윤(43세)씨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한류팬들 덕분에 지난 주말에는 플랫폼에서 신오쿠보역을 빠져 나오는데만 15분이 걸렸다”고 말했다. 3차 한류의 풍경이 과거와 전혀 다른 이유는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의 평균 연령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드라마 한류’ 당시 신오쿠보를 찾은 이들은 30~50대 여성이었다. 지금은 케이팝에 열광하는 10대 중고교생과 20대 초반 여성들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각양각색의 교복을 입은 중고교생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어 학원가를 연상케 했다. 30~50대에 비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보니 3차 한류팬의 씀씀이는 크지 않은 편. 드라마 한류팬이 1인당 4000엔(약 4만원) 정도를 썼다면 케이팝 한류팬은 2000엔 정도를 쓴다. 이승민 원장은 “객단가는 절반이지만 훨씬 많은 이들이 찾기 때문에 한국 식당과 가게들이 더 반긴다”고 했다.
현재 신오쿠보의 최고 명물은 치즈핫도그다. 젊은이들의 거리 하라주쿠의 명물이 프라페라면 이 곳에서는 치즈핫도그를 맛보지 않으면 신오쿠보를 방문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가는 한류팬들은 어김없이 치즈 핫도그를 들었고, 저마다 원조를 내세우는 핫도그 가게 앞은 어김없이 길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치즈핫도그는 한국에서는 생소하다. 어지간한 음식에 치즈나 마요네즈를 뿌려 먹을 정도로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춰 탄생했다. 2차 한류 당시 치즈를 넣어 대박을 친 치즈닭갈비의 공식이 핫도그에도 통한 셈이다. 중고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메뉴이기도 하다.
한류팬 주류가 정치적 영향 안받는 10~20대로 변화
신오쿠보의 좁은 골목들 가운데 한류팬들의 필수 탐방 코스인 ‘이케멘도오리’도 한국 특유의 문화가 일본 현지에서 통한 ‘토착 한류’다. ‘얼짱의 거리’라는 뜻의 이케맨도오리는 한국 식당들이 몰려있는 골목. 호객행위는 일본의 유흥가에서도 흔하지만 이곳 한국 식당들은 케이팝 스타처럼 젊고 잘생긴 한국 직원들을 집중 투입해 신오쿠보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이윤 씨는 “방송에 데뷔는 못했지만 신주쿠 지역 유흥가에서는 나름 유명세를 타는 ‘신주쿠 케이팝 아이돌 그룹’도 있다”고 말했다. 신오쿠보의 한국 사회가 3차 한류를 반기는 건 이번 만큼은 반짝하고 말 유행이 아니라는 기대 때문이다. 3차 한류의 주류가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10~20대 젊은 층이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한일 관계가 나빠지자 발걸음을 끊었던 중년 한류팬과 달리 10~20대들은 양국 관계가 아무리 악화돼도 신오쿠보를 꾸준히 찾는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10~20대들이 한류의 주소비층으로 자리잡으면서 ‘한국인이 더 많이 찾는 일본’의 양상도 변하고 있다.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은 “올들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10%로 준 반면 방한 일본인 숫자는 꾸준히 늘어서 구도가 변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700만명,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350여만명이었다. 아직까지 400만명을 넘었던 드라마 한류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이 나빠진 건 사실이다. 일본 서점가에는 혐한 서적이 앞다퉈 진열되고 포털 사이트에 ‘혐한’을 검색하면 60개 이상의 결과물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 전체 인구 가운데 혐한론자는 1%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표면적인 현상만 놓고 일본 사회의 전체 분위기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수치다. 나카지마 겐타로 요미우리신문 기자는 “현재 아베 정부는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힘을 쏟고 있지만 일본과의 무역규모가 10배, 인력교류는 7배 더 많은 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일본의 젊은 층과 치즈핫도그, 이케멘도오리 등으로 대표되는 토착 한류가 만남을 이어가는 한 한일관계가 비관적이지만은 않음을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한류팬들로 가득한 신오쿠보 거리가 증언하고 있었다.
도쿄=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