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과 전망] 민간 혁신역량 자승자박하는 한국
진화 이론에 ‘붉은 여왕 효과’라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이 변화하려고 해도 주변 환경과 경쟁 대상 역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변화와 혁신, 경쟁, 생존은 상대적 개념이다. 치타는 가젤보다, 가젤은 치타보다 민첩하고 더 빨리 달려야 살아남는다. 국가도 그렇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다 해도 경쟁국에 비해 투자와 혁신역량이 뒤떨어지는 국가는 상대적으로 정체 또는 퇴보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기다. 기술진보 속도와 범위가 전에 없이 빠르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창조적 파괴가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부문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산업혁명은 누구에게는 경쟁우위와 주도권 확보의 기회이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파괴와 도태의 위협이 된다.

이런 이유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11년 1월 29일에 “오늘 혁신에 매진하는 국가가 내일의 세계 경제를 지배한다. 미국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게 이것이다”고 했다. 미국은 아마존, 구글 등 혁신과 기업가정신이라면 이미 세계 최고다. 그런 미국에서 대통령이 나서서 혁신을 강조하고 혁신 생태계 조성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는 지금이 세계 경제사 흐름이 바뀔 수 있는 중대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화웨이를 봉쇄하며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것도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은 어디쯤에 있는가. 한국은 칸막이 사전 규제로 점철된 경제 제도, 크고 작은 기득권의 저항과 시위에 신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도 출시하기 어려우니 4차 산업혁명을 논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원격의료서비스 기술은 의료계의 반대에, 차량공유 서비스는 택시업계의 반대에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창조적 파괴 과정에 불가피한 구조조정은 물론이고, 생산 라인의 변경까지 노조가 극렬 반대하는 국내에서는 신기술 투자를 하려고 해도 겁부터 내야 할 일이 많다.

정부 규제는 복잡하고 노동 생산성은 낮은데, 변화에 반대하는 노조까지 한국은 투자 매력이 낮은 나라로 전락하는 중이다. 투자 유출입 통계를 봐도 그렇다. 작년에 해외로 나간 직접투자금액은 389억달러로 전년 대비 11% 증가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 직접투자금액은 145억달러로 2017년 대비 20% 감소했다. 투자의 탈(脫)한국 현상은 올 들어 더욱 확대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14일 발표한 ‘2019년 1분기 해외직접투자 동향’에 따르면 밖으로 나간 해외직접투자는 전년 동기보다 45% 증가한 141억달러로, 분기 기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기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직접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6% 감소했다.

국내 투자 환경은 열악한데 연구개발(R&D) 투자 인센티브를 줄여가는 정책방향도 문제다. 선진국은 민간 혁신역량 제고에 매진하며, R&D 투자 유인을 높이고 있는데 한국은 중소기업 중심의 혁신성장을 강조하며 대기업에는 법인세뿐 아니라 R&D 투자를 역(逆)차별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연구 및 인력 개발비에 대한 세액공제 제도다. 10년 전 대기업 R&D 공제 한도는 증가분 기준으로 40%, 당기분 기준으로 3∼6%였다. 지금은 각각 25%와 0∼2%로 대폭 줄였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다고 정부 R&D 예산을 늘리면서 민간 R&D 투자 유인을 줄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정부는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혁신 생태계의 조성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4차 산업혁명 쓰나미가 일단락되는 10년 뒤에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어찌 될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