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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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전과가 있는 정신질환자 A씨의 석방 여부를 두 집단의 법의학자들에게 물었다. 한 집단에는 “A와 비슷한 환자들이 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20%로 추정된다”고 ‘확률’로 말했다. 다른 한 집단에는 “A씨 같은 환자 100명 중 20명이 폭력을 저지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빈도’로 알려줬다. 작은 표현의 차이였지만 두 집단의 의견 차이는 컸다. ‘빈도’로 들은 집단이 ‘정신병원에 감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을 가능성이 ‘확률’로 들은 집단보다 두 배로 많았다. 확률로 얘기를 들었을 때는 온화한 모습의 A씨를 떠올린 반면 빈도로 정보를 전달했을 땐 ‘미쳐서 누군가를 죽이는 남자’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책마을] 인간의 직관이 공정한 재판을 망친다
애덤 벤포라도 미국 드렉셀대 법학 교수는 저서 《언페어》에서 사법제도의 틀 안에서 증거와 논리가 얼마나 공정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묻는다. 그는 행동심리학, 인지과학을 미국의 사법제도에 접목해 인간 사고의 비합리성을 파고든다.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법이라는 집 안에 있는 불공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도출해낼 방법이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책은 수사 단계부터 짚어간다. 허위 자백을 유도하는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과 잘못된 기억을 더듬어 범인을 지목하는 목격자는 한국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피고의 자백 녹화영상에서 카메라 앵글, 하루 중 심리가 이뤄지는 시간대 및 반대심문에선 단순한 단어 선택도 소송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배심원들은 인종과 나이, 성별과 직업 등의 사전 정보로 편견을 느낄 가능성이 있고, 판사의 의사 결정이 그가 자라온 환경, 갖고 있던 생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저자는 “사람의 결정은 자동으로 이뤄지는 빠른 직관적 과정과 그보다 느리고 통제된 숙고 과정 모두에 지배를 받는다”며 “판사는 직업 특성과 그동안 받은 훈련 덕분에 거의 전적으로 신중한 추론에 의존하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직관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다”고 서술한다.

자기공명영상(MRI) 같은 기기로 인간 행동의 근원인 뇌의 이상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도 소개한다. 전두엽 피질에 결핍이 있는 사람은 충동성과 감정적 흥분을 보여주는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이 높다. 계산해서 통제되고 감정이 없는 공격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편도체에서의 비정상적인 활동이 두드러진다. 범죄 성격에 따라 관여하는 신경 구조와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한계와 사법제도의 결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4부 ‘개혁’에선 인간의 편견이나 예측 가능한 실수를 피하기 위해 제도 밖에서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책은 의식적인 자각을 넘어 여러 인지적 요인에 휘둘리고 있는 다양한 사례에 한국의 현실을 비춰보게 한다. “부정의(不正義)는 우리 법률 구조 자체에 내재돼 있으며 매 순간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부정의의 근원은 편협한 경찰관이나 교활한 검사의 사악한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