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 코시크 전 의원 인터뷰…보수정권서 동서독 인적교류 더 확대
"보수, 신동방정책 계승 속 '하나의 독일' 원칙 지켜 균형점 찾아"
최근 남북한 방문…"남북한 인적교류 확대해야 군사적 긴장완화"
독일 내 '한반도 평화네트워크' 구축 재단 추진
[서독의 기억] ⑪"'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 편집자 주 =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흐름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통일'은 이제 현실적 주제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 통일의 '유일한 참고사례'에 관심을 기울여볼 때입니다.

한반도에서 8천500여 ㎞ 떨어진 동서독 통일과 이후 통합 과정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통일에 다리를 놓은 동서독 교류ㆍ협력이 이뤄지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당시 서독 현실과 한국 간에 유사점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남갈등' 못지않게 '서서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서독에서도 경제적 지원과 인권 문제가 갈등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인 올해, 연합뉴스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서서갈등'의 전개와 극복, 이 과정에서 민심의 흐름, 동서독 교류·협력의 일상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동독과의 공존에 성공했던 '서독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이제 겨우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거두려는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올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새로운 자료 조사와 관점으로 취재, 7∼8개의 관련 주제로 독자 여러분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첫 시리즈인 '서서갈등의 전개 및 극복과정', 두 번째 시리즈인 '동서독 정상회담과 서서갈등'에 이은 세 번째 시리즈입니다.

3개의 기사를 3일간 연재 중입니다.

기획에는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이진 훔볼트대 정치문화학 박사가 협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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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보수의 변신'에 인적교류 확대…"스파이?" 상호불신 줄어
⑪ "'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
⑫ 100배 바가지 동독수학여행…"칼날위 걷는듯했지만 효과 커"

"보수적인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1982년 말 정권을 다시 잡게 된 후 사회민주당의 신(新)동방정책도 넘겨받아 이어갔습니다.

보수진영이 신동방정책을 뒤집었다면 국가적으로 큰 충격이 왔을 것입니다.

보수진영이 원칙을 지켜나가되 동서독 긴장 완화를 위해 책임지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
하르트무트 코시크는 독일연방 하원에서 28년간 의원직을 지낸 7선 출신으로, 지난 총선에서 지지율이 여전히 높은 데도 불출마했다.

그는 의원 재임 시 독한의원친선협회 회장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지한파다.

그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속한 기독민주당의 자매정당인 기독사회당 소속이다.

기사당은 바이에른주(州) 지역정당으로 기독교 가치를 내세운 보수정당이다.

1970년대 사회민주당 소속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의 교류·협력에 방점을 둔 신(新)동방정책을 추진할 때 정치권에서 가장 강력히 비판했었다.

그러던 기사당은 1980년대 기민·기사 연합이 정권을 다시 잡은 뒤 동독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앞장서, 사민당 정권보다 더욱 인적교류가 늘어나도록 했다.

코시크는 연합뉴스 인터뷰를 통해 기민·기사 연합이 정권을 잡은 후 취한 대(對)동독정책과 인적교류 확대에 대해 설명했다.

코시크는 "사민당의 일부 정치인은 분단상황을 '관리'하려는 경향을 보인 반면, 기민·기사 연합은 일관되게 분단상황을 '극복'하려 했다"면서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의 신동방정책을 계승해 동서독 간 교류확대 및 긴장완화를 추진하면서도 '하나의 독일'이라는 원칙을 이어가 정책적 목표 및 이념 간의 균형점을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코시크와의 일문일답.

-- 1990년부터 연방하원의원을 지냈다.

2017년까지 28년간이다.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 30년 가까운 시간을 열정을 갖고 보냈기 때문에 좋은 기억을 갖고 정치를 떠났다.

다른 일에 열정을 쏟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떠날 수 있었다.

앞으로 독한관계 발전에 더 기여하고 싶다.

문화 관련 사업도 하고 싶었다.

이 때문에 현재 바이에른주(州) 소재 골트크로나흐 훔볼트문화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기업체에서도 고문으로도 역할을 하는 중이다.

-- 과거 서독에서 구성된 동독 실향민 단체에서 활동했던데, 실향민 단체는 1970년대 초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신동방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기사당은 1972년 기민당 주도로 이뤄진 브란트 총리 불신임안 처리시도에 동참한 데 이어 1973년에는 기사당이 집권한 바이에른(州)이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기민·기사 연합이 집권한 이후인 1983년에는 기사당 대표이자 바이에른 주 총리였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주도해 동독에 대규모 차관을 지원한 데 이어, 바이에른은 1982년 말∼1983년 초 청소년들의 동독 수학여행도 허가했다.

가장 오른쪽에 있었던 기사당에 노선 전환이 이뤄졌던 것으로 봐야 하는가.

[서독의 기억] ⑪"'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 헌법재판소가 기본조약에 대해 헌법 합치 판결을 했지만, 동독을 헌법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기사당의 입장을 반영했다.

기사당은 이후 사법적 판단을 존중해 기본조약을 문제로 삼지 않았다.

이후 1982년 말 기민·기사 연합이 정권을 잡고 헬무트 콜이 총리직에 오른 뒤, 신동방정책을 부정하지 않고 연속성을 유지했다.

헌재의 판결을 존중해 법치주의를 실행하되, 세부적인 면에서 대(對)동독정책을 정교화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찾았다.

슈트라우스가 차관 지원에 앞장선 것은 이런 차원이었다.

이 결과로 1980년대 동서독 간 인적교류는 진보정권 때보다 더욱더 확대됐다.

차관 지원에 대한 대가로 동독의 국경 무인자동화기(SM-70)의 철거 및 동독 정치범의 서독송환(Freikauf) 확대 등도 얻어냈다.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의 신동방정책을 계승해 동서독 간 교류확대 및 긴장완화를 추진하면서도 '하나의 독일'이라는 원칙을 이어가 정책적 목표 및 이념 간의 균형점을 찾은 것이다.

-- 당시 대동독정책에 대한 기사당과 사민당의 논리적 차별성은.
▲ 사민당의 일부 정치인은 분단상황을 '관리'하려는 경향을 보인 반면, 기사당은 일관되게 분단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현격한 차이라기보다 두 개의 독일을 헌법적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였다.

기사당은 독일 통일에 대한 원칙 및 헌법적 정신을 엄격하게 지키면서도 융통성 있게 현실적인 운용의 묘를 발휘하려고 했다.

기민당 소속인 콜 총리는 1989년 서독 본에서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과 회담을 하고 생방송으로 '서독인은 통일을 포기하지 않고 동독인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달했다.

동독인은 콜 총리의 메시지를 듣고선 '서독인도 통일을 원하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고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됐다.

-- 보수적인 기사당이 동독에 대한 차관 지원에 앞장선 것에 대해 당내 비판도 있었는데. 일부 의원들은 탈당도 했다.

▲ 슈트라우스 주 총리 및 당 대표의 입장에 대다수 기사당 정치인들은 동의했다.

이는 기사당이 이전에 비판했던 사민당 식의 유화정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면서 동독과의 대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유연한 접근방식을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보수진영 내에서 설득이 가능했다.

원칙은 강하게 내세우되 적용은 부드럽게 하자는 게 당시 기사당의 입장이었다.

[서독의 기억] ⑪"'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 보수적인 기사당이 변화하게 된 배경은.
▲ 1982년 말 정권을 다시 잡게 된 기민·기사 연합은 사민당이 실시해온 신동방정책도 넘겨받은 상황에서 책임을 지려고 했다.

보수진영이 신동방정책을 뒤집었다면 국가적으로 큰 충격이 왔을 것이다.

동서 관계에서도 냉각기가 도래했을 수 있다.

보수진영이 원칙을 지켜나가되 동서독 긴장 완화를 위해 책임지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국제정치 상황의 변화도 큰 변수였다.

국제사회가 관여된 헬싱키 협정으로 동독 내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기준이 마련됐다.

서독이 헝가리와 체코, 폴란드 등 사회주의 국가와 관계를 개선해나간 점도 동서독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독한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은가.

▲ 기존의 독한협회 명예 이사장으로서 활동을 확대해 독일의 지한파를 늘리고 싶다.

한반도 긴장완화 및 남북 간 관계개선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재단인 '하나의 코리아'(Ein Korea) 설립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발기인을 모집 중이다.

독일과 한국 간의 우호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일이 한반도 긴장완화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게 목적이다.

이를 위해 독일 내에서 한반도 긴장완화 및 평화구축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이다.

-- 최근 아시아에 다녀왔는데.
▲ 한국에 가서 문희상 국회의장 등을 만났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한국지부 설립 4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석했다.

방한 전 경제교육 사절단과 같이 북한도 방문했다.

일본을 방문해서 일본 정치인들과 한반도 관련한 논의를 함께했다.

-- 북한은 왜 갔는가.

▲ 제일 큰 목적은 북한과의 학술 교류 및 관광에 물꼬를 트기 위한 것이었다.

김일성대학 도이칠란트과를 방문해 앞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했다.

현재는 가능하지 않은 방안들이라도 상황이 개선되었을 때 실행할 수 있도록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모색했다.

[서독의 기억] ⑪"'가자! 동독으로', 방문확대로 긴장완화"…7選 출신 조언
-- 독일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계속 제기해왔다.

독일의 이런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인도적 대북지원을 적극적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이 있을까.

▲ 북한에서의 인권보호와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

북한 핵위기로 인권과 인도주의 문제가 묻혀버렸는데, 중요한 것은 긴장완화의 과정이 선행되면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인도주의적 지원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 한반도 상황에 대한 독일 언론 보도 및 독일 정부의 대응을 보면,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은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협상 방식과 한국 정부의 전략적 사고에 대해서도 큰 신뢰를 보이지 않는 듯한 인상이다.

▲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인 대북 정책에 대한 독일 일반의 더 깊은 이해와 그에 대한 독일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과거 독일 정부는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의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2001년 북한과 수교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인권문제개선 및 인도적 지원 협력 방안을 향후 독일과 북한이 논의하기로 수교 의정서상 명시한 바 있다.

2015년 후반기 남북 간 관계가 일시적으로 개선되었을 때 독일 의회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측면 지원활동을 전개했었다.

당시 내가 의회 대표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2014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과 독일 전문가 6명씩 포함된 위원회를 구성해 2017년에는 한반도 긴장완화 및 통일 관련 권고안을 만들기도 했다.

다시 독한 전문가위원회를 설치해 독일 정부 내 한반도 문제 이해도 제고 및 협력 관계의 진전을 도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남북한 인적교류 확대를 위해 한국 정부에 제안하고 싶은 것은
▲ 군사적인 긴장과 체제경쟁 속에서 인적교류가 이뤄지면 긴장이 완화된다는 것을 동서독 관계 등 현대사에서 경험했다.

동독으로 향하는 서독 여행객이 늘면서 양측 간 긴장이 완화될 수밖에 없었다.

남북한 간에 일반인의 왕래든, 전문가들의 만남이든 인적교류가 활성화되면 양측 간 접근이 더욱 이뤄지고 연결망이 촘촘히 짜일 것이다.

#서독의 기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