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6·25전쟁 69주년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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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깃발 아래 극복한 6·25
중국의 抗美援朝 전쟁 주장은
죄의식 없는 역사인식 발로
국군에 대한 자긍심 새기고
한미동맹의 결속 다져야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
중국의 抗美援朝 전쟁 주장은
죄의식 없는 역사인식 발로
국군에 대한 자긍심 새기고
한미동맹의 결속 다져야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
남한강을 따라가다 양평에 들어서면 지평리란 마을이 나온다. 약 68년 전 이곳에서 6·25전쟁의 판도를 바꾼 격전이 있었다. 랄프 몽클라르 중령이 이끈 프랑스 대대가 미 23연대와 함께 육박전까지 해가며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은 곳이다. 그때까지 중공군에 추풍낙엽처럼 밀리기만 하던 유엔군이 지평리 전투를 계기로 ‘인해전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반격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몽클라르라는 군인이다. 그 유명한 외인부대 출신으로, ‘코리아’로 파병되는 대대급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현역 중장이 자진해서 중령으로 계급을 내린 주인공이다.
안데스산맥 중턱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는 석가탑이 있다. 참전에 대한 보은으로 한국 정부가 기증한 것이다. 대통령 특사와 함께 그곳에 갔을 때 청년장교로 참전했던 가르시아 장군을 만났다. 여든이 가까운 노장군은 유난히 추웠던 강원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비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콜롬비아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네요!” 이 말을 하는 그의 눈시울이 살짝 젖었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이 사단장을 했던 미 해병1사단은 1942년 과달카날에서 무적 일본군에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부대다. 이 부대는 1950년 11월 장진호까지 올라갔다가 10배에 가까운 중공군에 포위됐지만,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질서있는 퇴각’을 해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그때 그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10만여 명의 피란민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나라가 유엔의 깃발 아래 뭉쳐 싸울 때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0월 30여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특유의 인해전술로 38선을 넘어 1951년 초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을 37도선 평택으로 밀어붙였다. 당시 미국은 ‘철수’까지 고려했다고 하니 까딱 잘못했으면 북한 공산당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에 의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질 뻔했다.
지난주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북침설을 주장하며 “북한이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평소 시 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데 대한 죄의식 없는, 너무나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중공군의 6·25 참전을 둘러싼 바른 역사적 평가는 한·중 두 나라가 더욱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이의 좋은 예가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한창 미국과 맞서는 ‘화웨이 사태’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이 “미국의 제재에 항미원조 전쟁 때의 상감령 전투 정신으로 맞서겠다”고 엉뚱한 말을 했다. 상감령 전투에서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미국과의 힘겨루기에서 한국을 중국 편에 서게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비유다. 이 모두 중국이 6·25 참전에 대해 역사 인식을 잘못해 벌어진 해프닝이다. 우리로서도 중국의 이 같은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패권국가를 꿈꾸는 중국을 다루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은 6·25전쟁 69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달려와 같이 싸워준 우방의 고마움을 전쟁의 상처를 모르는 젊은 세대라고 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보면 군대를 보낸 미국, 영국, 콜롬비아 같은 16개국 외에 전쟁물자를 지원한 나라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지금의 미얀마도 있다. 외국의 지원도 있었지만 열악한 여건 속에서 소련제 탱크에 맞서 용감히 싸운 우리 국군에 대한 자긍심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월남과 중국 국민당이 패망한 이유는 싸울 의지가 없어 대대, 사단급 전체가 총을 버리는 ‘집단투항’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그들을 버렸다. 그런데 우리 국군엔 그런 집단투항이 없었다. 1951년 4월 맥아더 장군은 상하원 고별연설에서 “한국군이 정말 장렬하게(magnificent) 잘 싸웠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지금 한·미 동맹으로 두 나라가 단단히 결속돼 있는 것이다.
안데스산맥 중턱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는 석가탑이 있다. 참전에 대한 보은으로 한국 정부가 기증한 것이다. 대통령 특사와 함께 그곳에 갔을 때 청년장교로 참전했던 가르시아 장군을 만났다. 여든이 가까운 노장군은 유난히 추웠던 강원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비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콜롬비아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네요!” 이 말을 하는 그의 눈시울이 살짝 젖었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이 사단장을 했던 미 해병1사단은 1942년 과달카날에서 무적 일본군에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부대다. 이 부대는 1950년 11월 장진호까지 올라갔다가 10배에 가까운 중공군에 포위됐지만,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질서있는 퇴각’을 해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그때 그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10만여 명의 피란민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나라가 유엔의 깃발 아래 뭉쳐 싸울 때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0월 30여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특유의 인해전술로 38선을 넘어 1951년 초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을 37도선 평택으로 밀어붙였다. 당시 미국은 ‘철수’까지 고려했다고 하니 까딱 잘못했으면 북한 공산당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에 의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질 뻔했다.
지난주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북침설을 주장하며 “북한이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평소 시 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데 대한 죄의식 없는, 너무나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중공군의 6·25 참전을 둘러싼 바른 역사적 평가는 한·중 두 나라가 더욱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이의 좋은 예가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한창 미국과 맞서는 ‘화웨이 사태’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이 “미국의 제재에 항미원조 전쟁 때의 상감령 전투 정신으로 맞서겠다”고 엉뚱한 말을 했다. 상감령 전투에서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미국과의 힘겨루기에서 한국을 중국 편에 서게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비유다. 이 모두 중국이 6·25 참전에 대해 역사 인식을 잘못해 벌어진 해프닝이다. 우리로서도 중국의 이 같은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패권국가를 꿈꾸는 중국을 다루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은 6·25전쟁 69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달려와 같이 싸워준 우방의 고마움을 전쟁의 상처를 모르는 젊은 세대라고 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보면 군대를 보낸 미국, 영국, 콜롬비아 같은 16개국 외에 전쟁물자를 지원한 나라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지금의 미얀마도 있다. 외국의 지원도 있었지만 열악한 여건 속에서 소련제 탱크에 맞서 용감히 싸운 우리 국군에 대한 자긍심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월남과 중국 국민당이 패망한 이유는 싸울 의지가 없어 대대, 사단급 전체가 총을 버리는 ‘집단투항’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그들을 버렸다. 그런데 우리 국군엔 그런 집단투항이 없었다. 1951년 4월 맥아더 장군은 상하원 고별연설에서 “한국군이 정말 장렬하게(magnificent) 잘 싸웠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지금 한·미 동맹으로 두 나라가 단단히 결속돼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