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쁘게만 볼 수 없는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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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호 < 성균관대 의대 학장·소아청소년과 i101016@skku.edu >
남을 안다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면 알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나의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자기주도적 만족 학습이 된다. 호감을 주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서도 도파민은 분비될 수 있다. ‘뒷담화’ 덕분이다. 뒷담화는 사실 타인에 대한 평가다. 타인의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행동누출(behavioral leakage)’에 나의 무의식이 더해진 ‘상상’을 의미한다.
뒷담화를 나쁘게만 볼 수도 없다.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라고 했다.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 집단적 상상마저 가능하게 됐다는 ‘뒷담화 이론’을 펼친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이 뒷담화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현재주의(presentism)’라고 한다. 즉 남을 평가할 때 상상은 현재의 범위를 뛰어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상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지각도 동시에 관장하기 때문이다. 뇌로서는 실제 상황을 지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일 수밖에 없다.
대니얼 길버트는 그의 저서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에서 인간이 상상할 때 세 가지 오류를 범한다고 했다. 첫째, 상상하는 과정에서 없는 정보를 채워 넣거나, 있는 정보를 빠뜨린다. 둘째, 우리는 현재를 미래에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일단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상상할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타인의 선택은 그 사람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것은 원래 인문학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러나 내가 선택할 경우에는 그 대상의 특징에 원인을 둔다. (“나는 인문학이 내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혹은 우리는 좋아서 선택하기보다는 다른 게 싫어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내가 OO당에 표를 준 건 ××당이 싫어서야”) 남의 선택은 늘 그들이 좋아하는 걸 반영한다고 믿는다. (“친구가 ××당을 찍었다니 아마도 성향이 그쪽이어서 일 거야”)
뒷담화는 상상과 허구가 엮여 개연성 있는 팩트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진화한 삶의 일부인 것을.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뒷담화도 우리 곁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뒷담화에 에너지를 쏟는 우리는 지치면서도 이를 즐기니, 분명 중독성은 강한가 보다.
뒷담화를 나쁘게만 볼 수도 없다.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라고 했다.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 집단적 상상마저 가능하게 됐다는 ‘뒷담화 이론’을 펼친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이 뒷담화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현재주의(presentism)’라고 한다. 즉 남을 평가할 때 상상은 현재의 범위를 뛰어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상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지각도 동시에 관장하기 때문이다. 뇌로서는 실제 상황을 지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일 수밖에 없다.
대니얼 길버트는 그의 저서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에서 인간이 상상할 때 세 가지 오류를 범한다고 했다. 첫째, 상상하는 과정에서 없는 정보를 채워 넣거나, 있는 정보를 빠뜨린다. 둘째, 우리는 현재를 미래에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일단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상상할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 타인의 선택은 그 사람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것은 원래 인문학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러나 내가 선택할 경우에는 그 대상의 특징에 원인을 둔다. (“나는 인문학이 내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혹은 우리는 좋아서 선택하기보다는 다른 게 싫어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내가 OO당에 표를 준 건 ××당이 싫어서야”) 남의 선택은 늘 그들이 좋아하는 걸 반영한다고 믿는다. (“친구가 ××당을 찍었다니 아마도 성향이 그쪽이어서 일 거야”)
뒷담화는 상상과 허구가 엮여 개연성 있는 팩트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진화한 삶의 일부인 것을.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뒷담화도 우리 곁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뒷담화에 에너지를 쏟는 우리는 지치면서도 이를 즐기니, 분명 중독성은 강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