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주 오름테라퓨틱 대표가 대전 문지동 본사에서 개발 중인 신약 후보물질을 설명하고 있다.  /오름테라퓨틱 제공
이승주 오름테라퓨틱 대표가 대전 문지동 본사에서 개발 중인 신약 후보물질을 설명하고 있다. /오름테라퓨틱 제공
“전임상(동물실험) 단계에 진입하는 게 목표여서는 안 된다. 임상 자체가 목표가 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 몸에서 효능을 보겠다고 하면 연구 목적부터 달라지게 된다.”

이승주 오름테라퓨틱 대표(45)의 사업 철학이다. 임상 단계에 진입한 뒤 다국적 제약사 등에 기술이전을 목표로 하는 여느 바이오벤처와는 결이 다르다. 대학 및 다국적 제약사 등과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추구하면서도 기술이전을 종착역으로 여기지 않아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믿음이다.

이 대표의 꿈은 치료 효과뿐 아니라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신약 개발이다. 노바티스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같은 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글리벡은 골수이식을 받아야 하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하루 한 번만 복용하면 장기 생존하거나 완치까지 되는 약이다. 이 때문에 기적의 항암제로 불린다. 그는 “10년 내에 글리벡 같은 항암제를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이승주 오름테라퓨틱 대표 "세계 최초 암 치료 항체 기술 개발…글리벡 같은 혁신 신약 내놓을 것"
쥬라기공원에 꽂힌 청춘

어릴 적부터 막연히 생물학자를 꿈꿨던 이 대표는 연세대 생화학과에 입학했다. 서울 경문고 재학 당시 찾았던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단단히 매료된 그는 대학 선택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개봉된 영화 ‘쥬라기공원’은 그가 인생항로를 정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호박 안에 있는 DNA를 채취해 공룡을 탄생시키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죠. 원래는 순수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쥬라기공원을 본 뒤 생명공학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어요.”

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대표는 스탠퍼드대에서 2년의 박사후과정을 거친 뒤 LG생명과학(현 LG화학 생명공학사업본부)에 입사했다. 그는 “교단에 서는 것보다는 직접 신약 개발 연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입사 5년 만에 사노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300여 명이던 LG생명과학보다 연구원 수가 50배 많은 다국적 제약사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이후 그는 사노피 아시아연구소장에 올랐다. 상하이 도쿄 대전 등 동북아 세 곳에 나뉘어 있던 사노피 아시아연구소는 간암 위암 등 아시아인에게 잦은 질환을 연구했다. 이 지역의 벤처기업, 대학 등과 협업하며 치료제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도 했다. 사노피 근무 경험은 그에게 큰 자산이 됐다. 그는 “글로벌 신약개발후보 선정 위원회를 통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했다.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창업

이 대표와 오름테라퓨틱 공동창업자인 김용성 아주대 공대 교수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학·연 신약개발 교류 모임에서였다. 당시 이 대표는 LG생명과학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세포질 안에 항체를 집어넣어 암을 치료하는 새로운 개념의 항암 기술을 접한 이 대표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기술 완성도가 낮았지만 그때부터 김 교수의 연구를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김 교수가 내는 논문은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사노피로 옮겨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6년 넘게 지켜보던 이 대표는 2016년 창업을 결심했다. 상업화 연구를 시작해도 될 만큼 김 교수의 연구가 수준에 올랐다고 판단했다. 그는 “김 교수의 연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며 “그 기술 하나만 믿고 미련없이 창업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사명에 창업 의지를 고스란히 담았다. 오름은 험악한 산을 오르듯 힘든 신약 개발의 긴 여정을 극복해내겠다는 뜻이다. 그는 “해외 바이오 전문가들에게 자문까지 해 사명을 정했다”며 “산·학이 힘을 모아 세계적 혁신 신약을 개발하는 성공사례를 만들겠다”고 했다.

혁신 항체 기술 확보

오름테라퓨틱이 보유한 핵심 기술은 ‘세포침투 간섭항체’다. 암을 치료하는 항체를 세포질 속으로 전달하는 기술이다. 항체가 세포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치료 효과가 떨어지는 항체 의약품의 단점을 극복할 혁신 기술로 꼽힌다. 게다가 수백만 종류의 세포 가운데 특정 세포에만 항체가 들어가도록 하는 기술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미국 알비나스가 비슷한 기술을 갖고 있지만 합성신약에만 한정된다.

합성의약품은 분자 크기가 작아 항체 의약품에 비해 세포질 속으로 잘 들어가지만 타깃 단백질에 고정할 수 있는 홈(pocket)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항체는 표면적이 넓어 홈이 없는 단백질도 잘 잡지만 합성신약은 약물 크기가 작아 홈이 없으면 달라붙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름테라퓨틱의 세포침투 간섭항체는 기존 항체의약품과 합성의약품의 단점을 한꺼번에 해결할 기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대표는 “세포침투 간섭항체는 다양한 질환 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이라고 했다.

이 회사는 라스 돌연변이를 표적으로 하는 항암제를 개발 중이다. 라스는 종양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단백질이다. 췌장암의 95%, 대장암의 52%, 비소세포폐암의 30%에서 라스 돌연변이 단백질이 확인됐다. 하지만 라스 돌연변이 단백질을 직접 표적으로 하는 치료제는 아직 없다. 이 회사는 세포침투 간섭항체를 통해 라스 단백질 돌연변이가 보내는 종양 성장 신호를 차단하면서 암 세포의 성장을 늦추는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동물실험에서 효과도 확인했다. 이 대표는 “정맥주사를 투여해 암세포를 찾아가는 동물실험을 했더니 암세포의 70~80%를 사멸시키는 효과를 보였다”고 했다.

“글리벡 같은 신약 개발이 목표”

이 대표는 개발 중인 약물의 상업화까지는 앞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에 들어가기 전에 최적의 후보물질을 찾는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다. 그는 “현재 수십 종류 이상의 암 모델 실험을 통해 어떤 유전자를 가진 암에 효과가 있는지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유전자 분석, 가설 검증 등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최적의 후보물질을 찾고 있다”고 했다.

바이오마커(생체표지자)를 찾는 중개연구 등에 전력투구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임상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는 “사노피에서 근무할 당시 끊임없는 가설 검증을 거치고도 임상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사례를 많이 봤다”며 “동물실험과 사람 대상 임상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회사는 해외저널에 중개연구 결과를 다룬 논문을 꾸준히 게재하고 있다. 작년에 두 건을 실었고 올 들어서도 논문 게재를 준비 중이다. 그는 “내년쯤에야 임상 계획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어떤 환자에게 쓸 수 있는 약인지를 예측할 수 있고 글리벡처럼 암을 만성질환으로 바꿔놓을 혁신 신약을 개발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미국 보스턴 지사도 7월께 본격 가동한다. 이 대표는 “혁신적인 일을 하려면 전 세계 두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국 지사를 냈다”며 “현지에서 인력을 채용해 한국과 미국 연구소가 함께 연구 시너지를 내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직원이 다니기 좋은 회사”

이 대표는 국내 대기업과 글로벌 제약사에서 두루 경험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기업 문화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기업 문화가 그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스마트폰 운영체제가 안드로이드냐, 애플 iOS냐에 따라 앱 성능이 달라지듯 기업 문화도 마찬가지”라며 “경험한 기업의 좋은 제도나 장점을 벤치마킹해 직원들이 다니기 좋은 회사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직원들이 만족하면 자연히 성과가 나온다는 생각에서다.

이 대표는 연구원 등 직원들이 각자 전문성을 살려 최대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직책을 없애고 영어 호칭을 쓰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표는 사내에서 ‘SJ’로 불린다. 주니어 직원도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의사결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회의 때 편하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기업도 생명체처럼 스스로 진화하고 발전해야 한다”며 “임직원에게 적절한 책임과 자유를 주면 성과를 낸다는 Y이론을 믿고 있다”고 했다.

Y이론은 미국 경영학자 맥그리거가 1961년대 주장한, 조직관리에서의 인간에 관한 가설 유형의 하나다. 인간 본성은 긍정적, 능동적이어서 민주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은퇴한 후에도 회사가 계속 성장하도록 발판을 닦는 게 창업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름테라퓨틱은 지금까지 9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현재 추가 투자유치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이 대표는 “4~5년 내에 코스닥 상장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