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째 이어진 '입스와의 사투'
'눈물 젖은 빵' 10년 무명골퍼
다잡은 우승 아깝게 놓쳤지만
'포천힐스大戰' 화제의 주인공
지난 25일 경기 용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가 또 배꼽인사를 했다. 당시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많은 갤러리의 응원을 받은 게 처음이었는데, 그 응원에 어울리는 경기를 못 했어요. 마지막 버디 퍼트라도 넣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정식 레슨 받지 않은 ‘독학골퍼’
생애 첫승을 놓친 그는 대신 챔피언급 인기를 얻었다. 1400여 명이던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며칠 새 2000명을 돌파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외모가 금세 갤러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물 젖은 빵’을 10년 가까이 먹은 그의 이야기가 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8년째 이어진 ‘입스(yips)’와의 사투, 2부투어를 전전하면서도 잃지 않은 정규투어 챔피언의 꿈….
대회장을 찾은 갤러리들은 그가 버디를 잡으면 내 일처럼 기뻐했다. ‘비주류의 반란’을 팬들은 고대했다. 이 스토리는 끝내 쓰이지 않았지만 팬들은 끝까지 남아 그의 사인을 받아갔다. 많은 이들이 ‘캔디’ 같은 한상희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했다. 한상희는 “우승은 놓쳤지만 얻은 게 많은 한 주였다”고 돌아봤다.
한상희는 말 그대로 ‘꾸역꾸역’ 골퍼가 됐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중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그는 사실상 독학으로 골프를 배웠다. 정식 레슨을 한 번도 받지 않았고, 겨울 해외 전지훈련도 가본 적이 없다. 2009년 프로가 된 뒤 정규투어에 올라오는 데에도 5년이 걸렸다.
2부투어에서 뛰면서 한때 대기업 후원을 받기도 했던 것은 잠재력 때문이다. 키 174㎝에 260야드를 넘나드는 시원시원한 장타가 특기. 그러나 ‘시드’가 보장되는 정규투어 상금순위 60위 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딱히 못하는 것은 없는데 ‘결정적인 한 방’이 따라주지 못했다. 그가 이 대회 전까지 10여 년간 모은 통산 상금은 2억3000여만원. 연봉으로 치면 2300만원 정도다. 숙소와 교통비 등 이것저것 떼고 나면 오히려 적자다. 그래도 그는 웃는다.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 보시지만 사실 전 정말 ‘행복한 골퍼’예요. 상금도 간간이 벌었고 후원사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행운도 따라서 우승 경쟁도 해봤잖아요. 모든 일에 감사해야죠. 하하.”
방송출연·피팅 모델 제의 받기도
한상희는 올 시즌을 앞두고 정규투어 시드순위전 41위를 기록했다. 정규투어 출전이 보장되지 않는 순위다. 2부투어와 1부투어를 오가야 하는 상황. 겉은 웃고 있지만 남몰래 눈물을 훔친 날도 많았다.
“수백 번, 수천 번 골프를 그만두고 싶었던 게 솔직한 얘기예요. 방송 쪽이나 골프 피팅 모델, 혹은 다른 분야가 내게 맞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죠. 물론 제가 끼가 있지 않은 걸 누구보다 잘 알았죠. 그래서 ‘진짜’ 그만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회사원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 둘거야’라고 말하는 느낌과 같다고 할까요.”
그를 골프로 이끈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랬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용인에서 ‘배 농장’을 크게 했다. 딸이 골프에 소질을 보이자 배밭을 갈아엎어 골프연습장을 만들었다. 딸이 프로가 되고 투어에 뛰어들자 그 땅을 팔았다.
“아버지가 배 농사지으실 때가 기억나요. 저 때문에 애지중지하던 땅을 판 것도요. 어머니는 수상 인명구조자격증이 있어 구청에서 ‘라이프 가드’로 일하세요. 넉넉하진 않았지만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요. 아! 그러고 보니 운동 신경과 외모는 엄마를 닮았네요.”
BC카드·한경 대회서 ‘빛’을 보다
한상희의 별명은 ‘집순이’다. 집과 골프연습장을 오가는 게 하루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연애박사’일 줄 알았다는 말에 그는 “집에 있는 것을 워낙 좋아해 남자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비디오게임 ‘배틀필드’를 하거나 애니메이션 그리기를 더 좋아한다. 취미 이야기가 나오자 인터뷰 내내 질문을 받던 그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마마마(일본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아시나요? 에이, 이 정도로는 ‘덕후’라고 할 수 없죠. 입문용쯤 된다고 할까. 가끔 ‘마마마’ 그림을 그리기도 해요. 집에 있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요.”
또 다른 ‘스트레스 해방구’는 게임이다. “게임도 안 해본 것이 거의 없어요. 스타크래프트도 해봤고 롤(LOL)도 당연히 섭렵했죠. 그런데 하면 할 수록 게임엔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아요. ‘아, 골프하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인생 최고의 한 주를 보낸 한상희는 다시 2부투어로 돌아갔다. 하지만 틈틈이 정규투어 대회에도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BC카드·한경 대회를 통해 아주 작지만 빛을 봤어요. 저를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 어머니, 팬들이 있으니까 이젠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를 하던 그에게 물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듯한 병아리색 가방이 궁금해서였다.
“이거요? 문방구에서 산 거예요. 그냥 명품 같은 거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요. 하하.”
"기생충 같은 '퍼팅 입스'…'펜타곤 그립'으로 잡았죠"
한상희는 독특한 퍼트 자세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두 발을 모으고 양 팔꿈치를 날개처럼 편 뒤 팔 모양을 ‘오각형’으로 만든다. 오각형을 뜻하는 영어 단어 ‘펜타곤’을 따 ‘펜타곤 그립’(사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퍼트 입스를 고치기 위해 그가 수년의 연구 끝에 고안해낸 자세다. 압박감이 들면 양 손목이 제멋대로 돌아가 50㎝ 퍼트도 놓치던 그는 펜타곤 퍼팅 이후 입스 공포에서 벗어났다.
한상희는 “입스는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정의대로 ‘근육 경련’이다. 무의식에서 거의 발작 수준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홀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공포, 두려움이 몰려온다”며 “욕심과 실력에 ‘갭’이 생기면 나타난다”고 했다.
펜타곤 그립은 불필요한 손목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손목을 꺾어서 그립을 잡는 게 특징. 손을 쓰지 않는 만큼 방향성과 스트로크 안정성이 좋다고 한다.
“어깨 힘을 최대한 빼려고 해요. 공과 발 사이 폭은 좁게 하고 두 발을 아주 조금만 벌립니다. ‘핸드 퍼스트’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면 손목 사용을 거의 하지 않고도 ‘시계추 원리’가 만들어지더라고요.”
한상희는 이젠 트레이드마크 같은 이 자세를 고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화제잖아요. 입스가 진짜 기생충 같아요. 아직도 제 몸에 기생하고 있죠. 제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와 갑자기 뿌옇게 만들고는 사라져요. 이 자세를 잡은 뒤로는 그 기생충이 잘 나오지 않아요. 펜타곤 그립이 한마디로 ‘구충제’ 역할을 하는 셈이죠. 하하!”
용인=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