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를 마주한 채…복국의 고수를 만났다…뱃고동 안주 삼아 한 女人의 인생사에 건배
통로인 동시에 단절이기도 한 바다. 어제는 섬으로 가는 뱃길이 돼 주던 바다가 오늘은 또 뱃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됐다. 서남해상에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여객선들은 모두 부둣가에 꽁꽁 묶여 있다. 서남해의 섬들은 또 여지없이 고립됐다. 오늘 목포항에서 흑산도로 들어가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흑산도뿐이랴. 울릉도나 백령도, 거문도처럼 먼바다의 섬들은 유난히도 고립이 잦다. 1년에 적게는 50일, 많게는 100여 일을 배가 못 다닌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 못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그뿐이 아니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해도 너울성 파도가 높아 못 다니기도 한다. 그보다 더한 복병도 있다. 안개. 겨울과 여름에는 주로 바람과 파도 때문에 뱃길이 단절되지만 봄에는 바람도, 파도도 없는데 수시로 출몰하는 안개가 뱃길을 끊어놓기 일쑤다.

교통불편으로 고통당하는 흑산도 주민들

여객선은 그저 섬과 육지를 연결해주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생명의 연결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객선은 생명선이다. 예전에는 육지라면 아무것도 아닌 복통이나, 감기 합병증 같은 작은 병으로 죽어간 섬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배가 못 떠서 치료의 때를 놓친 까닭이다. 갑작스런 돌풍으로 침몰해 죽어간 섬사람도 수천 명이었다. 육지 한번 왕래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서러운 세월을 살았던 섬사람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여전히 섬은 자주 고립되고 작은 사고가 치명적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흑산도에서 밤 10시40분경에 교통사고 응급환자가 발생했다. 밤이라 여객선도 안 다니고 응급헬기도 오지 않았다. 다행히 새벽 두시쯤 근처를 지나가던 경비정과 연락이 닿아 육지로 후송할 수 있었지만 응급환자가 육지의 큰 병원에 도착한 것은 사고 발생 7시간쯤 후였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였다면 이미 치료도 못 받아 보고 사망했을 것이다.
바다는 섬을 잇는 통로이자 뱃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바다는 섬을 잇는 통로이자 뱃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섬 살이, 특히나 흑산도 같은 큰 바다 건너에 사는 사람들은 교통 불편으로 당하는 고통이 크다. 육지는 기차와 버스, 지하철, 비행기 같은 수많은 대체 교통수단이 넘쳐나지만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것은 오로지 여객선 하나뿐이다. 그 여객선도 1년에 50일에서 100일까지 단절된다. 육지에서는 고장이나 파업 등으로 하루만 열차나 지하철, 버스가 안 다녀도 난리가 난다. 1주일쯤 안 다니면 폭동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섬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참고 살아야 할까. 흑산도에 소형 공항 건설 계획이 있지만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일부 육지 사람들의 반대로 좌초 위기에 있다. 국가지질 공원이자 해양보호구역인 울릉도의 공항건설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국립공원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외국의 수많은 국립공원에는 공항이 있고 비행기들이 오간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국립공원 내에 공항이 4개나 된다. 유네스코세계유산이자 일본의 국립공원인 야쿠시마 섬에도 공항이 있다. 그런데 흑산도는 여전히 고립을 강요받고 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겸 목포 선창가 선술집으로 찾아든다. 마른 복국과 주인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나그네의 시름을 달랜다. 주인이 끓여준 복국이 막혔던 속을 뚫어준다.

머구리(잠수부)로 시작한 기구한 여성의 인생사

생 복국의 고수들은 많지만 말린 복국의 고수들은 만나기 어렵다. 조리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말린 생선을 입에서 살살 녹게 만드는 게 기술이지.”
뼈가 녹을 정도로 끓여 깊고 시원한 국물맛을 낸 복어곰국
뼈가 녹을 정도로 끓여 깊고 시원한 국물맛을 낸 복어곰국
주인 여자는 전남편과 28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헤어졌다. 혼자가 되니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없다. 환갑이 넘어 뒤늦게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한다. 직장 다니는 아들 딸 뻘 되는 동급생들과 ‘엠티’도 다니고 ‘스터디’도 하고 같이 술도 마시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속절없이 가버린 청춘을 되찾은 듯하다. 전남편은 완도군 소안도 태생이었는데 ‘머구리’(잠수부)를 하다가 보길도에 정착했다. 여자는 노화도가 고향이었다.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세 섬은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섬들이다. 노화에 살던 여자는 남자를 만난 뒤 보길도로 들어가 살림을 합쳤다. 둘 다 초혼이 아니었다. 하나는 아들 셋, 하나는 아들 둘이 있었다. 지금은 그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다 키워서 공부시키고 장가까지 보냈다. 살림을 합치고 보니 홀시아버지에 장가 안간 ‘시아재(시동생)’까지 모두 아홉 식구나 됐다.

어로활동에 쓰이는 대나무를 파는 목포선창가 대나무판매점.
어로활동에 쓰이는 대나무를 파는 목포선창가 대나무판매점.
“노화도 큰 애기가 손 날랍고 빠르제. 어려서는 삼립빵 공장에도 다녔었어.”

다른 섬 처녀들이 그렇듯이 여자도 어린 시절 부산으로 가서 삼립빵 제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었다. 고향 노화도가 세 섬 중 유독 갯벌이 많은 섬이었던지라 해본 가락이 있어서 여자는 낙지도 곧잘 팠다.

남편의 첫 여자는 제주 해녀였다. 그녀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홧김에 농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남편의 집은 보리 한 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여자의 첫 남편도 ‘머구리’였다. 동갑내기였는데 제주 성산포에서 잠수를 하는 사람이었다. 펜팔로 만났더랬다. 아이들 셋을 낳고 잘 살았었는데 잠수병을 얻었고 끝내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런데 또 ‘머구리’ 남자를 만났다.

“우리 식구 몸 하고 바꾼 돈을 갖고 가서 2년을 지냈지.”

6년간 하루같이 갖은 고생을 다해 가족 봉양

흑산도를 마주한 채…복국의 고수를 만났다…뱃고동 안주 삼아 한 女人의 인생사에 건배
여자는 첫 남편 사고 보상금으로 나온 돈을 가져가 두 번째 남편 식구들이랑 2년을 먹고살았다. 그 후로는 막막했다. 그런데 마침 통리에 선착장 공사가 있었다. 공사 책임자를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 공사판 인부들 밥을 도맡아 해주는 함바집을 시작했다.

“나 혼자만 세상을 다 짊어지고 산 거 같었어.”

함바집을 하면서 겪은 고생은 차마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6년 그 징한 세월을 날마다 새벽 세시면 일어나 밥을 했다. 그때는 다른 연료가 없던 시절이라 매일 나무로 불을 때서 50명분의 밥을 짓고 국 끓이고 반찬을 만들었다. 낮에도 쉴 틈이 없었다. 방죽에 가서 물을 길어다 놔야 했다. 오후에는 그 물을 가마솥에 붓고 장작 불을 때서 끓였다. 일 끝나고 온 저녁마다 인부들 50명이 씻을 수 있는 따뜻한 물이 필요했다. 여자 혼자서 매일같이 그 징그러운 일을 다 했다. 6년, 2190일 동안 32만8500그릇의 밥을 지었고, 10만 동이의 물을 길어다 끓였다. 그뿐일까? 아홉 식구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물이 빠지는 때면 또 뻘에 나가 낙지랑 조개를 파다가 함바집 반찬거리도 장만했다. 세상에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도 있다. 여자가 그랬다. 오로지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인 여자의 공으로 집안의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 그런데

“돈 좀 번께 신랑이 바람이 난 거야.”

그것도 윗마을 사는 남편 친구의 아내랑 바람이 났다.

“지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여자를 가졌었는디. 손이 못 한 게 없고 비싼 손인디.”

바람피우지 말라고 말리면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막 뚜드려 패고, 한번은 장작으로 뒤통수를 쳐갖고 내 눈이 나와 버렸었어.”

다행히 병원 가서 주사를 맞으니 눈은 들어갔다. 하지만 남편에게 맞아서 귀 한쪽은 아주 들리지 않게 돼버렸다.

바람피우는 것을 동네 사람도 다 알고 소문도 다 났는데 남편은 끝끝내 오리발을 내밀었다. 결국 “두 연놈이 여관에 들어가는 현장을 누가 알려줘서” 여관까지 가서 조용히 기다렸다. 지금은 사라진 노화도 섬장 여관 7호실. 오징어와 맥주까지 시켜놓고 마시면서 “두 연놈의 정사가 끝나길 기다렸지.” 드디어 “두 연놈이 옷 챙겨 입는 소리가 들리자” 문밖에서 소릴 질렀다.

“끝났으면 나와.”

하지만 그 후로도 두 사람의 만남은 지속됐다. 결국 여자 쪽 남편도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여자가 서울로 도망가면서 사태는 종결됐다.

여자는 더 이상 섬에 살기가 남부끄러워 식솔들을 이끌고 목포로 나왔다. 그런데 목포 나와서도 남편의 바람기는 잦아들 줄 몰랐다. 또 바람이 났다. 여자가 전남편에게 낳아서 데려왔던 큰아들의 학교 친구 엄마랑 바람이 났다. 몇 번을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다가도 아이들 때문에 살았다. 남편은 잘생긴 것도 아닌데 여자가 잘 따랐다. 알고 보니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잘생기도 안했어. 근데 돈을 잘 써. 돈을 잘 쓰니 여자가 자꾸 붙어.”

그래도 여자는 자식들 생각해서 이혼만은 안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사귀던 그 여자가 5년 동안이나 쫓아다니며 헤어지라고 강짜를 부리는 통에 결국 마음을 접었다. 마음을 접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마침내 파란만장했던 두 번째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별다른 절차는 필요가 없었다. 제주해녀였던 그 전 시어머니가 “남자랑 살더라도 혼인 신고는 하지 말라”는 아주 현명한 충고를 했었고 여자는 그 충고를 따랐다. 그 때문에 보길도에서 남편이랑 바람났던 여자는 ‘호도(호적도) 없는 년이 까분다’며 오히려 큰소리치며 덤비기도 했지만 말이다.

대구껍질 누르미와 홍어 껍질묵의 맛

여자는 복어 요리의 기술자다. 생선을 말리는데도 선수다. 마른 생선은 간을 삼삼하게 해야 맛있다. 너무 짜게 절여서 말리면 맛이 없다. 생선은 무조건 “산 놈을 말려서” 쓴다.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말리는데 햇볕보다는 바람에 살살 말리는 것이 좋다. 복어를 다룬 지도 벌써 35년째다. 복은 독이 있어서 손질이 정확해야 한다. 복을 손질할 때는 댕강 머리도 잘라버리는데 머리 쪽의 껍데기는 남긴다. 복 껍질뿐이랴. 껍질이야말로 생선 맛의 절정이 아닌가! ‘민어껍질, 숭어껍질에 밥 싸먹다 논밭 다 팔았다’는 식담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통영의 전통음식인 대구껍질 누르미나 홍어 껍질묵의 그 사르르 녹는 맛은 또 어떤가! 복 머리 껍데기까지 살뜰히 챙기는 그래서 여자가 기술자다.

섬에서도 복은 최고의 맛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복은 맹독이 있으니 늘 위험천만했다. 예전 섬에서는 복을 먹고 죽는 일도 빈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복어 독은 약이 없었다. 섬에서는 복을 먹고 죽은 사람은 열흘 정도 묻지 않고 놔뒀다. 죽은 줄 알았는데 1주일, 열흘 만에 되살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해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냥 요리가 아니다. 사람 목숨이 걸린 요리다. 하지만 복은 절차에 따라 완전히 해독을 하면 문제가 없다. 사고는 꼭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다 당한다. 오늘 여자의 요리는 노화도, 보길도 살던 시절 해먹던 특별한 복요리다. 그냥 복국이 아니라 복곰탕이다. 그녀의 진하고, ‘징한’ 삶이 녹아들어간 요리.

복은 참복이나 까치복을 주로 쓴다. 생복을 사서 잘 손질하고 독을 뺀 뒤 바짝 말려뒀던 것이다. 35년 복요리를 해왔지만 여자의 복요리를 먹고 탈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는 겨울철이면 장작불을 때서 밤새도록 고아서 먹었던 것인데 요즈음은 압력솥에 고아낸다. 딱딱한 뼈가 녹을 정도로 끓인다. 국물을 떠먹으면 입안이 찐득찐득해질 정도가 돼야 제대로 고아진 것이다. 복어 곰국에는 파, 마늘, 참깨, 참기름을 고명으로 넣는다. 여자의 비법이다.

흑산도를 마주한 채…복국의 고수를 만났다…뱃고동 안주 삼아 한 女人의 인생사에 건배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섬택리지》《통영은 맛있다》《섬을 걷다》《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