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상황을 보면서 (후속 대책을) 연구해야 할 것 같다.” 전날 일본 정부의 반도체 관련 세 가지 핵심 소재에 대한 금수 조치와 관련해 대응책이 있느냐는 물음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일 내놓은 발언이다.

한·일 ‘경제 전쟁’이 임박했음에도 정부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4일부터 수출 규제가 현실화되면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대응이 지나치게 안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 생각에 잠긴 강경화 외교부 장관 >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차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국제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 생각에 잠긴 강경화 외교부 장관 >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차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국제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기업들 마음은 타들어 가는데…

대일(對日) 외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 온 청와대부터 이번 사안에 대해선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지만 대응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외교부도 마찬가지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정례 브리핑을 열었으나 “(일본 정부에)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강 장관은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일본의 보복성 조치가 나온다면 (우리 정부도) 거기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정작 사태가 벌어지자 대책이 없음을 시인한 셈이다.

청와대는 일본의 도발을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번 보복 조치는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 정부가 보수우파의 표심을 겨냥한 행위”라며 “일본 측에서 싸움을 걸어오는데 여기에 직접 응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최근 한·일 관계 악화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의무를 적시한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판단을 일본 정부가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협박’에 나서긴 했지만 실제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최근 일본 방위상이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회담에 앞서 웃고 있는 사진이 나가자 일본 내에서 비난 여론이 크게 일었다”며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도 자국의 반한 여론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보복 조치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뾰족한 대응책 없어

전문가들은 실패한 대일 외교로 인해 기업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전날 외국환과 외국무역관리법에 따른 우대 대상인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기 위한 시행령 개정 의견 수렴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달에 업계 의견을 듣고 내달 1일 시행령을 개정할 예정이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면 일본 국가안보와 관련한 전략물자를 우리나라에 수출할 때 일본 정부 승인을 매번 거쳐야 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주요 소재를 규제하는 것 못지않게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품목으로의 금수 조치 확대가 검토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경제 보복에 이어 외교적 공세의 고삐도 바짝 죄고 있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외교 당국 간 해결을 위해 확실히 전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외교부가 대화에 응하라는 요구다.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협정(3조1항)에 근거한 분쟁 해결 수단으로 지난 1월 9일 우리 정부에 외교상 협의를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지난달 19일 한·일 양국 기업의 자발적인 출연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자고 역제안을 내놨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 뒤 대화에 응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즉각 거부했다.

일본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응책이 마땅치 않다는 게 정부의 고민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이번 보복 조치와 관련된 주무 부처들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검토 중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WTO에서 결론이 나려면 2년여의 시간이 걸린다”며 “2010년 일본이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 조치에 대해 WTO에 제소해 3년 만에 승리했지만, 그 기간 일본 산업계는 이미 막대한 피해를 봤다”고 지적했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