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부시 대통령을 ‘그 사람’이라고 칭했다. 물론, 사석에서다. 그 시절 청와대 참모들의 증언이다. 두 정상은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다. 귀족과 서민의 거리만큼이나 간극이 컸다. 특히 두 정상의 대북관은 도저히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보였다. 부시 대통령은 김씨 세습 정권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 계승을 자임한 노 정부를 부시 대통령은 ‘가재는 게 편’ 수준에서 판단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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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갈등은 2005년 11월 경주에서 폭발했다.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노 대통령의 대미 감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 해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해법을 담은 ‘9·19 공동성명’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우리 정부의 숨은 노력과 ‘중재역’을 맡은 중국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미국은 김정일과의 양자회담은 끝까지 거부했지만 다자회담엔 참석했다. 핵·미사일 실험 중지와 경제적 보상의 맞교환이 이뤄질 찰나였다. 하지만 방코델타아시아(BDA)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미 재무부가 9월에 BDA를 북한의 돈세탁 창구로 지정했다. 9·19 공동성명은 파기 직전에 몰렸다. 한·미 정상은 경주에서 이뤄진 1시간 가량의 회담을 격론으로 끝내고 말았다.

경주 정상회담 이후 노 대통령은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손사레를 쳤다. “만날수록 감정만 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마음이 한번 돌아서니, 누구도 쉽게 설득에 나서지 못했다. 한·미 동맹이 와해될 것이란 우려와 탄식이 쏟아졌다. 노(盧)의 청와대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외교안보 라인이 총대를 멨다”고 회고했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 송민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절이다. 송 수석은 노 대통령 입에서 “정말 귀찮게 해 못 살겠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요하게 설득했다고 한다. 한·미가 틀어지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논리였다. 국익을 위해선 사감(私感)을 뒤로 할 것을 끊임없이 간(諫)했다.

그 결과, 2006년 9월 노 대통령은 방미를 단행했다. 한·미 정상은 2006년 11월에 하노이에서 다시 만났고,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미 대통령으로부터 ‘종전선언’이란 말을 처음으로 이끌어냈다. 얼마 전엔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 추모를 위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관계는 요즘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 불화를 닮았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정치 귀족’ 출신이고, 문 대통령은 월남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납치의 아베’로 불리며 최장수 일본 총리를 꿈꾸는 아베 총리는 일본인을 납치한 김씨 세습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북한’을 공존의 대상으로 본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두 정상 간 감정 싸움이 촉발한 측면이 크다. 오사카에서 지난달 28~29일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일본은 ‘외교적 대화’를 요청했지만, 우리 정부는 끝내 이를 거절했다. 아베 총리는 G20 정상회의 ‘문전박대’로 외교적 공세를 취하더니, 급기야 반도체 소재 등 3개 핵심 물자에 대한 금수(禁輸)라는 경제 보복을 감행했다.

문(文)의 청와대와 노(盧)의 청와대가 다른 것은 ‘간(諫)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외교안보수석 역할을 하고 있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발벗고 나서지 않는다. 한 전직 외교 관료는 “일본과의 외교를 이대로 둘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나쁜 거잖아요’라는 말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문 정부의 핵심 외교안보 관계자가 한 얘기다. 먼 훗날 증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요즘 청와대에서 아베 총리에 대한 호칭은 ‘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외교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기다. ‘총성없는 전쟁’이 외교고, 전쟁의 와중에도 적국과 대화하는 게 외교관의 직무다. 사감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끊임없이 간했던 ‘제2의 송민순과 반기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동휘 정치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