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 노동자 보호 역행"…인상률 낮추려는 협상 전술 관측
경영계 '최저임금 4.2% 삭감안' 논란…"제도 취지 부정하는 것"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가 노사 양측의 극단적 주장으로 처음부터 과열 양상을 빚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와 영세 소상공인의 임금 지급 능력 등에 관한 합리적인 논의보다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비생산적인 논의를 계속함으로써 현행 최저임금 결정체계의 신뢰도만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지난 3일 오후 5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제8차 전원회의를 열어 내년도 최저임금 수준 심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자정이 되자 최저임금위는 그 자리에서 제9차 전원회의를 열어 논의를 이어갔으나 4일 새벽 2시께 결론 없이 종료했다.

9시간 동안 평행선만 달린 것이다.

사용자위원들은 제8차 전원회의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의 최초 요구안으로 올해(8천350원)보다 4.2% 삭감한 8천원을 제시해 근로자위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국내에서 최저임금제도를 처음 시행한 1988년 이후 경영계가 삭감안을 제시한 것은 2010년 적용 최저임금 심의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경영계는 5.8% 삭감을 요구했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삭감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근로자위원들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사용자위원들이 제시한 삭감안은 최저임금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저소득, 비정규 노동자들을 우롱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저소득 노동자의 보호라는 최저임금의 제도적 가치와 헌법적 가치를 부정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내 최저임금제도 사상 최저임금을 삭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010년 적용 최저임금도 경영계의 삭감 요구에도 결국 2.75% 올랐다.

전문가들도 최저임금 삭감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최저임금을 낮추면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최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이 깎이는데 이는 저임금 노동자 보호라는 최저임금제도의 취지 자체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면 임금 인상률이 최소한 물가 인상률보다는 높아야 하는 만큼, 최저임금의 삭감뿐 아니라 동결도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 악화를 초래한다.
경영계 '최저임금 4.2% 삭감안' 논란…"제도 취지 부정하는 것"
최저임금을 삭감하면 실업급여와 취약계층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금도 줄줄이 감액된다.

최저임금이 이들 지원금의 기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삭감으로 취약계층 전반의 생계가 악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잘 아는 사용자위원들이 최저임금의 삭감이라는 극단적인 요구안을 내놓은 것은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을 최대한 낮추기 위한 협상 전술로 볼 수 있다.

노동계를 자극해 근로자위원들의 '악수'(惡手)를 끌어내기 위한 전술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가 노동계에 불리하게 진행될 경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근로자위원들이 집단 퇴장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근로자위원들만 남아 노동계가 수적으로 불리해진다.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에서 경영계의 강경한 입장은 소상공인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업종별 차등 적용에 강하게 반발하는 소상공인 대표 2명은 제8∼9차 전원회의에도 불참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근로자위원들의 최초 요구안(19.8% 인상)도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년 동안 급격했던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20%에 가까운 전례 없는 인상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노사 양측이 합리적인 논의 대신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힘겨루기를 계속함에 따라 현행 최저임금 결정체계에 대한 불신만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는 최저임금위원회를 이원화해 전문가들이 최저임금 인상 구간을 정하면 노·사·공익위원이 그 안에서 금액을 정하도록 하는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이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의 수순이 될 수 있다고 보며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