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움이란 감정은 들여다볼수록 오묘하다. 다른 사람의 호의나 도움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갚으려 애쓰는 것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감정을 지녔다는 사실은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진화 과정에서 사라졌을 터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고마움이 다른 사람들과 쉽게 협력하게 해 당사자에게 도움을 준다고 설명한다. 세상의 기본 질서가 협력이니 호의나 도움을 갚으면서 협력적 관계를 맺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얘기다.

이런 설명이 품은 함의들 가운데 하나는 고마움이 친구를 식별하는 기능을 지녔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행동들을 오래 기억하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인 행동들은 쉽게 잊는다. 적은 당장 위협이 되지만 친구는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고마움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오래 기억하도록 해 자신의 둘레에 친구들을 모으는 데 도움을 준다. 자연히 적들이 모일 여지를 줄인다.

권력을 쥔 사람에겐 이런 식별이 특히 중요하다.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을 마다하고 직언하는 신하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충신을 모을 수 없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 일컬어진 당 태종도 직간하는 위징을 몇 번이고 죽이려 했다. 이제 시민들이 권력을 쥔 세상이니, 시민들이 고마움을 통해서 친구들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근자에 자유한국당이 ‘막말’을 마구 한다고 비난받는다. 실언들을 한데 모아 놓고 큰일이라도 난 듯 비난한다. 집권 세력의 실언들과 실책들을 모으면 두툼한 책이 되리라는 사정은 외면한다.

자유한국당은 전체주의의 특질을 짙게 띤 현 정권에 맞서 대한민국의 구성 원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려 애쓰는 정당이다. 그런 사정을 인식하고 고마움을 느껴야 비로소 자유한국당의 진정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정치적 폐허에서 자유한국당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그래도 홍준표 후보는 필마단기로 20%가 넘는 지지를 받아 문재인 후보의 득표가 50%를 넘지 못하게 막았다. 만일 문 후보가 50% 넘게 득표했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흉흉할까?

많은 사람이 그의 발언들을 ‘막말’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입밖에 내기를 꺼리는 사실들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얘기한다. 장관들이 기자들 없는 곳에서 자기 얘기만 하고 끝내는 것을 ‘기자 회견’이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야권 지도자에게 더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황교안 대표는 정치 입문이 일천하지만, 야당 지도자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지난번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집권당이 두 곳에서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승리했다. 이어 전국 순회 집회들에서 자유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극도로 적대적인 환경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정을 새겨야 한다. 이번에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 강연에서 별것 아닌 내용이 대중매체의 적대적 주목을 받은 데서 이 점이 잘 드러났다.

그래도 이번 강연의 내용이 빈약했다는 점은 남는다. 야당 대표가 젊은이들에게 취업에 관해 얘기한다면 시장에 적대적인 현 정권의 정책들이 일자리를 크게 줄였다는 점을 먼저 얘기해야 한다. 이어 시장을 존중하는 정당이 집권하면 사정이 나아지리라는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필요한 지식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얘기해야 한다. 이번 일은 황 대표가 당의 자원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자유한국당은 뿌리가 깊은 정당이어서 대표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적지 않다. 그런 자원을 활용해야 적대적 환경에서 상처를 덜 입을 수 있다.

근년에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친구들을 알아내는 능력을 많이 잃었다. 이번 자유한국당 ‘막말’ 사건이 그 심각한 위험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