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환영식에서 인사 후 지나치는 문재인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신조 총리. / 사진=한경DB
지난달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환영식에서 인사 후 지나치는 문재인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신조 총리. / 사진=한경DB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단행과 관련, 국내 기업 피해가 크다는 견해와 일본 측 피해도 상당할 것이란 견해가 맞서는 가운데 지일(知日)파 전문가들은 정부가 컨트롤타워를 맡아 즉각 대일(對日)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소재·부품 분야 비대칭이 극명해 일본에 ‘맞불’ 놓을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일관되게 “일본의 수출규제는 사실상 경제보복으로 철회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8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이같이 언급했다. 홍 부총리는 앞서도 일본 측 조치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배치된다고 수차례 거론했다.

일본이 수출규제 방침을 밝힌 후 정부가 내놓은 대내외적 대책은 WTO 제소, 매년 1조원 집중 투자를 통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등이다. 문제는 이들 조치가 중장기 방안은 될 수 있어도 ‘발등의 불’을 끄는 데는 역부족이란 것이다.

◆ WTO 제소, 실효성 떨어지고 승소 보장 없어

9일 관련 업계와 학계 관계자들의 진단을 종합하면 수출규제 대상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감광액)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은 품목별로 많게는 90% 이상 일본 업체에 의존하고 있다. 엄격해진 일본의 심사과정, 국내 재고 여력 등을 감안했을 때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최대 3~4개월이 한계라는 분석. 반면 WTO 제소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1~2년 이상 걸린다. 소재·부품 국산화 역시 몇 년 안에 금세 일본 업체들 수준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낮다는 게 전문가들 중론이다.

출처=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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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대일 소재·부품 교역은 151억달러(약 17조7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만성적이다. 2014~2018년 최근 5년간 소재·부품 대일 무역적자 규모가 총 763억달러(약 90조원)에 달한다. 한일경상학회는 소재·부품이 대일 무역 역조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 등은 소재·부품 세부 분류상 ‘화학물질 및 화학제품’ ‘고무 및 플라스틱’ 품목에 속한다.

익명을 요청한 전문가는 “연간 230억~240억달러 내외 대일 수출적자의 ‘정체’가 결국 소재·부품이다. 우리가 수출하는 건 D램, 낸드(NAND) 플래시 같은 범용성 완제품인 반면 일본의 핵심 수출품목은 생산과정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짚었다. 그는 “비대칭이 심각하다. 똑같이 수출 규제해도 우리에겐 치명타지만 일본은 품질이나 가격안정성 면에선 다소 떨어져도 거래선을 다양화할 여지가 있다”며 “상황이 이런데 일본도 우리 못지않게 타격을 받는다는 식의 낙관론은 ‘정신승리’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WTO 제소 등 정부 대책에 대해서도 “기업은 한 시가 급한데 한가로운 소리로 들린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결론이 날 때까지 몇 년 걸린다. WTO 제소가 당면대책이 될 순 없다”면서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다. 일본 측 논리는 ‘편의를 위한 시혜성 절차 간소화(화이트 리스트)를 일반적 상태로 되돌리는 조치’여서 WTO가 문제삼을 만한 법적 권리 박탈은 아니란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정부가 중심 잡고 '대일 협상' 전면에 나서야

정치적 쟁점을 사실상 경제보복으로 갚은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우리 정부의 대처에 대한 문제제기도 나왔다.

일본 전문가인 한광희 한신대 IT경영학과 교수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수차례 일본 측 신호가 나왔는데 안이하게 대응한 측면이 분명 있다”며 “WTO 제소도 일본 정부가 검토 후 패소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해 이번 액션을 취했을 것이다. 정부 차원 외교적 노력 이외에 개별 기업이나 민간 차원에서 문제를 풀긴 어려워보인다”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도 “수출규제를 오는 21일 현지 참의원 선거를 앞둔 보수층 결집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그게 본질은 아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단행한 조치”라고 평가한 뒤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 수출규제 피해를 입는 기업들까지 이해관계자를 모두 참여시켜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일본에 제시할 구체적 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일본 측 관점에선 위안부 합의처럼 번복되면 곤란하다. ‘최종안’이 아니면 일본 정부가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기존 스탠스를 버리고 철저히 실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양국 관계에 정통한 관료 출신 인사는 “이번 사태는 과거와 현재, 정부와 민간,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투트랙 한일관계’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한광희 교수는 “구조적으로 소재·부품 대일 의존도가 너무 높다. 아쉽게도 우리 측 카드가 거의 없다”면서 “지금은 자존심 싸움할 때가 아니다. 양국 관계 경색 해소를 최우선에 두고 ‘일본 기업도 피해를 입는다’는 현지 여론이 힘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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