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해외출장과 혁신
1990년대 초반 상공부 산업정책국 사무관으로 일할 때다. 나중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당시 국장은 유럽, 미국 등 선진국으로 출장을 갈 경우 정해진 일을 마친 후 하루 정도 더 체류할 시간을 줬다.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 관계자 인터뷰, 자료수집 등 학습 기회를 가진 뒤 귀국할 것을 주문했다.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여 나간 출장인데 ‘정해진 일만 보고 귀국한다면 낭비’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루 정도 더 머무르면서 학습해 오는 것이 업무와 정책 혁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해외출장 중 엉뚱한 일정에서 혁신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도요타 생산방식이 그 예다. 1956년 일본 도요타의 오노 다이이치와 시고 시게오는 미국 출장을 떠났다. 이들은 출장 중 접한 슈퍼마켓 시스템에 매료된다. 당시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자동차와는 아무런 관련 없을 것으로 생각된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우연히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당시 자동차 회사의 생산은 중앙집권적 의사결정에 따라 이뤄지고 있었다. 기업의 기획부서에서 시장 수요를 과학적으로 예측해 생산계획을 세운 뒤 최고경영자가 확정했다. 공장에서는 이에 따라 생산하면 그만이었다. 한두 가지 모델을 대량생산해 나가기에 적당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다. 소비자들의 소득 증가로 수요가 점차 개성화되자 이런 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슈퍼마켓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슈퍼마켓에서는 진열대의 특정 상품이 비워지는 만큼 다시 채워놓는 방식으로 판매가 이뤄지고 있었다. 슈퍼마켓 주인은 과학적 분석이나 계획 없이 상품별 판매 수량만큼 다음날 다시 주문하기 때문에 재고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슈퍼마켓 판매 시스템에서 힌트를 얻어 이른바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과 간판시스템이라는 도요타 생산방식을 고안해 도입한다. 이 방식에 힘입어 1970년대 도요타는 유연생산체제를 구현했다. 서로 구별되는 2만여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각 모델의 생산량은 50대에 불과했다. 차량 중 약 35%는 고객 주문에 따라 생산했다. 1990년대 초 도요타의 시스템은 일본 내 다른 제조업에서도 일반화됐고 일부 선진국으로 확산되면서 3차 산업혁명으로 진화하게 된다.

우리 경제는 지금 다양한 대내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기존 틀에서 벗어나 생각의 폭과 시각을 넓혀야 한다. 개방적 사고와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