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근로자들이 경기 화성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클린룸에서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근로자들이 경기 화성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클린룸에서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르면 이달부터 낸드플래시 생산량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불황으로 재고가 급증한 와중에 일본 정부가 핵심 소재 수출을 규제하자 선택한 ‘고육책’이다.

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 하반기 낸드플래시 대규모 감산과 관련해 시기와 규모를 저울질하고 있다. 낸드플래시는 D램과 달리 전원이 끊겨도 데이터를 보존하는 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다양하게 쓰이는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공급이 일본의 수출 규제로 막히자 영업적자를 내는 낸드 생산부터 줄인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지난 2분기 낸드 사업에서 3000억원 안팎의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부터 수천억원대 적자를 내고 있다.

한 반도체 협력사 대표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장기화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낸드 감산 규모는 급격히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단독] 삼성·하이닉스, 낸드 감산 검토
日, 美가 화웨이 때리듯 '표적 사격'…삼성, 결국 낸드 감산하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 감산’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고육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생산라인 가동률부터 낮춰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촉발된 한·일 긴장관계가 정치·외교적으로 풀릴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가 장기화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D램 생산도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D램과 낸드플래시를 공급받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이번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이유다.

삼성전자 전례없는 감산, 왜?

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4월 1분기 실적을 발표할 때 낸드플래시 생산을 줄일 수 있는 길을 열어 놨다. “생산라인을 최적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겠다”(전세원 삼성전자 부사장), “올해 낸드플래시 웨이퍼 투입량이 지난해보다 10% 이상 줄어들 수 있다”(차진석 SK하이닉스 부사장)는 원칙과 기준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엔 “시황과 재고 수준에 따라 결정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두 회사 모두 2분기 말부터 반도체 수요가 점진적으로 살아날 것으로 내다봤던 시기다. 생산량을 적극적으로 줄이기보다는 일단 수요가 살아날 때까지 재고를 안고 가는 전략을 택했던 배경이다.

이런 생산 전략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메가톤’급 이슈가 일본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다. 반도체 제조의 다양한 공정에 쓰이는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감광액),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 공급이 사실상 끊어지면서 당장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할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에칭가스가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칭가스는 반도체 웨이퍼의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식각과 불순물을 세척하는 세정 작업에 사용된다. D램, 낸드플래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거의 모든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수적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에칭가스 재고가 떨어지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순서대로 생산라인을 멈추게 될 것”이라며 “감산은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늦추기 위한 미봉책”이라고 설명했다.

낸드플래시부터 감산을 검토하는 것은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나기 때문이다. 시장 조사기관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0.3달러 수준에 거래되던 1기가바이트(GB)급 낸드플래시 평균 거래가는 올 1분기 0.152달러로 반토막 수준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GB 낸드플래시 제조 원가(0.155~0.166달러)보다 낮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2분기 낸드 사업에서만 수백억~수천억원의 영업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이번 감산 검토를 놓고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꼴”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일본 경쟁사는 ‘반사이익’

반도체업계에선 세계 1위 낸드플래시 제조업체인 삼성전자가 감산 시기와 물량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 2008~2009년 반도체업계에서 마지막 ‘치킨게임’이 벌어질 당시에도 생산을 인위적으로 줄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감산에 들어갈 경우 세계 낸드플래시 거래 가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지난해 기준 삼성전자(38.5%)와 SK하이닉스(11%)의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50%에 육박한다. 여기에 미국 마이크론이 지난달 웨이퍼 투입 기준 감산 규모를 전년 동기 대비 5%에서 10%로 확대했다. 세계 2, 3위 업체인 도시바와 웨스턴디지털의 합작 공장인 일본 요카이치 반도체 라인도 지난달 정전 사태 이후 공장 가동이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길어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D램까지 감산할 경우 시장에 미치는 충격파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기준 삼성전자(42.8%)와 SK하이닉스(29.6%)의 D램 시장 점유율은 72.4%에 달한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한국 메모리 업체의 감산으로 D램과 낸드 가격이 폭등하면 이 제품을 갖다 쓰는 아마존, 구글, 화웨이 등 글로벌 IT 기업들은 타격을 입겠지만 마이크론, 인텔, 도시바, TSMC 등 한국 기업의 경쟁사들은 이득을 본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에 따른 득실을 따져보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