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페인트칠을 하던 그는
새하얀 복도 끝에서 내려다보곤 했다
어둑한 버스 정류장을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가끔
그럴 때면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이름도 병명도 없이
간호사들 사이에서 낭만주의자라고 불렸다
안과 밖의 색이 같아지는 아침이 되면
밤에 꾼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 하나를 지었다고
벽을 시멘트로 바른 집이었다고
페인트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는 코를 틀어막았고
눈은 금방 충혈되었다
그의 꿈은 모든 것이 선명했지만 유일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은 집의 주소였다
그럴 때마다 다시 복도 끝을 서성거렸다
유난히 로비가 시끄럽던 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사람들은 그 집을 상상했다
모두가 다르게 벽을 색칠하고
익숙하게 냄새를 맡았다

시집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 中

‘알비노’는 백색증으로도 불리는 유전병의 일종이다. 시인은 알비노를 두고 평생 페인트칠을 하던 그를 떠올린다. 이 시를 읽으면, 새하얀 복도 끝에 서서 어둑한 버스정류장을 내려다보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칠 것만 같다. 그렇게 안과 밖의 색이 같아지는 아침이 올 것만 같다. 이른 시간부터 동료 시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어젯밤 쫓기는 꿈을 꿨다고. 그의 꿈속에 나왔던 가파른 계단을 상상했다. 아마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처지는 너무 익숙해서 다 안다고 착각한다.

이소연 < 시인(2014 한경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