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87)는 옛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서독으로 이주해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자본주의 사실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자본주의 사실주의는 동독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응해 형성된 장르다. 당시 미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팝아트의 독일적 변형이다.

1960년대부터 다양한 색깔을 탐구하기 시작한 그는 추상화를 비롯해 인물화, 액션 페인팅, 극사실주의 등을 두루 섭렵하며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1982~1983년에는 17세기 북유럽 정물화 양식인 바니타스(vanitas : 삶은 화려하더라도 짧고 덧없음) 기법에 관심을 갖고 촛불과 해골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1982년에 완성한 이 그림도 촛불을 모티브로 제작한 바니타스 정물화의 대표작이다.

촛불의 이미지를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뿌옇게 그렸다. 결국 사라질 대상이지만, 덧없는 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욕망을 역설적으로 묘사했다. 여기서 촛불은 초월성, 불확실성, 부정적인 가능성 등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힌다. 촛불의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면서 사각형 모형의 색층을 만드는 데 롤러를 활용했다.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