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회담의 추억…성공보다 실패 사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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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영삼, 민주화 담판·노무현-박근혜 대연정 담판 유명
18일 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담 결과에 따라 정국 향방 갈려 영수(領袖)는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를 뜻한다. 본래 의복 용어다. 영(領)은 옷깃을 뜻하고, 수(袖)는 옷소매를 가리킨다. 모두 옷 가운데 가장 때가 잘 묻고 잘 닳는 부위다. 옷깃과 소매에 짙은 색의 천을 덧대는 이유다. 그래서 ‘영수’는 옷 부위 가운데 남의 눈에 가장 잘 띌 수 밖에 없다. 옷깃과 소매에서 유래한 영수는 어떤 집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영수회담’은 국가 또는 정치 단체, 사회 조직의 수장들이 만나 현안을 놓고 논의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과 여야 대표간 회담으로 통용되는 영수회담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권과 대립각을 곧추 세운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여러 차례 만나 정국 현안을 논의했다.
문재인 정부는 영수회담이라는 용어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영수회담은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권 시절에 통용되던 용어여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면서 ‘제왕적 총재’ 역할을 하던 시절이 지났고, 당 대표의 자율성이 커진 시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여전히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수회담은 여야 대치로 정국 경색 국면이 장기간 지속될 때 대통령이 여야 대표를 만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뤄졌다. 난국 타개용이다. 하지만 성공 사례 보다 서로 할말만 하고 헤어진 뒤 정국이 오히려 더 경색된 실패 사례가 더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 간 1975년에 이뤄진 영수회담은 많은 뒷얘기를 낳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조치들을 요구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혼자 사는데 무슨 욕심이 있겠냐. 권력에 미련없다. 직선제와 민주화를 해놓고 물러나겠다. 사나이 명예를 걸고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1979년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이는 부마항쟁과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부 때 영수회담이 가장 많이(10번) 열렸다. 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협상 상대였다. 김대중 정부에선 야당 대표와 모두 8차례 영수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2회로 줄어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이 2003년 7월 영수회담을 제안한데 대해 “나는 여당의 영수가 아니라 행정부 수반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대표끼리 만나 회담하는 것이 여야 영수회담”이라면서 거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9월 7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가진 대연정 담판은 유명하다. 노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2시간 30분 동안 대연정 필요성을 설파하고,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아예 그 말을 꺼내지 말라”며 반대해 실패했다. 영수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가 오는 18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회담한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은 “사상 초유의 한·일 간의 무역갈등이 벌어지고 있고, 이것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이 사안을 최단 시일 내에 해결해 나가기 위해 초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회담에서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와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여야의 협력 방안과 국정 현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회담에는 이해찬 민주당, 황교안 한국당, 손학규 바른미래당, 정동영 민주평화당,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각 당 비서실장, 대변인이 참석한다. 문 대통령은 2015년 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회담했는데, 이번엔 역으로 주인이 됐다. 회담 결과에 따라 정국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회담 뒤 각 당 대변인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올까.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yshong@hankyung.com
18일 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담 결과에 따라 정국 향방 갈려 영수(領袖)는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를 뜻한다. 본래 의복 용어다. 영(領)은 옷깃을 뜻하고, 수(袖)는 옷소매를 가리킨다. 모두 옷 가운데 가장 때가 잘 묻고 잘 닳는 부위다. 옷깃과 소매에 짙은 색의 천을 덧대는 이유다. 그래서 ‘영수’는 옷 부위 가운데 남의 눈에 가장 잘 띌 수 밖에 없다. 옷깃과 소매에서 유래한 영수는 어떤 집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영수회담’은 국가 또는 정치 단체, 사회 조직의 수장들이 만나 현안을 놓고 논의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과 여야 대표간 회담으로 통용되는 영수회담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권과 대립각을 곧추 세운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여러 차례 만나 정국 현안을 논의했다.
문재인 정부는 영수회담이라는 용어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영수회담은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권 시절에 통용되던 용어여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면서 ‘제왕적 총재’ 역할을 하던 시절이 지났고, 당 대표의 자율성이 커진 시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여전히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수회담은 여야 대치로 정국 경색 국면이 장기간 지속될 때 대통령이 여야 대표를 만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뤄졌다. 난국 타개용이다. 하지만 성공 사례 보다 서로 할말만 하고 헤어진 뒤 정국이 오히려 더 경색된 실패 사례가 더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 간 1975년에 이뤄진 영수회담은 많은 뒷얘기를 낳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조치들을 요구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혼자 사는데 무슨 욕심이 있겠냐. 권력에 미련없다. 직선제와 민주화를 해놓고 물러나겠다. 사나이 명예를 걸고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1979년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 제명을 당했고, 이는 부마항쟁과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부 때 영수회담이 가장 많이(10번) 열렸다. 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협상 상대였다. 김대중 정부에선 야당 대표와 모두 8차례 영수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2회로 줄어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이 2003년 7월 영수회담을 제안한데 대해 “나는 여당의 영수가 아니라 행정부 수반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대표끼리 만나 회담하는 것이 여야 영수회담”이라면서 거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9월 7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가진 대연정 담판은 유명하다. 노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2시간 30분 동안 대연정 필요성을 설파하고,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아예 그 말을 꺼내지 말라”며 반대해 실패했다. 영수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가 오는 18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회담한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은 “사상 초유의 한·일 간의 무역갈등이 벌어지고 있고, 이것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이 사안을 최단 시일 내에 해결해 나가기 위해 초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회담에서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와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여야의 협력 방안과 국정 현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회담에는 이해찬 민주당, 황교안 한국당, 손학규 바른미래당, 정동영 민주평화당,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각 당 비서실장, 대변인이 참석한다. 문 대통령은 2015년 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회담했는데, 이번엔 역으로 주인이 됐다. 회담 결과에 따라 정국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회담 뒤 각 당 대변인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올까.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