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황 부진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 '직격탄'
日 규제 확대 가능성에 재계 자구책 백방 모색
소재·부품·장비 산업 국산화 노력…장기전 대비 '글로벌 여론전'도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대(對)한국 소재 수출 규제 발표는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그동안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대일 의존도가 높아 만일의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은 있었으나 현실화할 것으로 예측한 기업은 많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난해 말부터 글로벌 반도체·디스플레이 업황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당에 한일 외교갈등으로 인한 초대형 악재를 맞은 데 이어 규제 확대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와 업계는 민관 공조 체제를 구축하고 중장기 산업 육성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일본의 '횡포'를 알리는 글로벌 여론전에도 나서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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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SK·LG '비상체제' 가동…이재용·신동빈 출장길
19일 업계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한국에 대한 일부 핵심소재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예고한 직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 관련 기업들은 즉각 '비상체제'를 가동하고 대책 마련에 발빠르게 나섰다.

수출 규제가 실제로 발동된 것은 지난 4일이었지만 삼성전자는 이틀전인 2일에 일찌감치 고객사에 서한을 보내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안내했으며, SK하이닉스도 비슷한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업체는 또 일본 정부가 지목한 3개 핵심 소재의 자체 재고 물량을 점검하는 동시에 일본에 임직원을 급파하고, 현지 법인 등을 통해 추가 물량 긴급 조달이 가능한지 등을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전문 경영인들은 물론 그룹 총수들도 직접 나섰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 발동 사흘째인 지난 7일 일본 출장길에 올라 엿새간 도쿄(東京)에 머물면서 현지 업계 관계자들을 잇따라 만나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에 앞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지난 5일 일본을 방문, 현지 재계와 금융권 유력 인사들을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도 일본 현지의 공급망을 선제 점검하기 위해 18일 출국했다.

특히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은 일본 출장 일정을 이유로 청와대 측에 양해를 구하고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30대 그룹 총수 간담회에도 불참해 사태의 심각성을 추측케 했다.

이들 업체는 양국의 기싸움이 이어지면서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본을 벗어나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실제로 중국 언론은 한국의 일부 반도체 업체가 산둥(山東)성에 있는 화학업체인 빈화(濱化)그룹에 불화수소를 주문했다고 보도했으며, 일본 언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 업체가 아닌 제3의 기업에서 제조한 불화수소의 품질 시험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또 국내 중견·중소 소재 업체들을 대상으로 품질 성능을 통해 일본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지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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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관 공조체제 가동…소재·부품 산업 육성 중장기 대책 마련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등을 빌미로 한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로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면서 정부와 기업은 '민관 공조' 체제를 가동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예고' 발표 전날인 지난달 30일 산케이(産經)신문이 이를 보도하자마자 정부는 업계와 긴급회의를 열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수급 대책을 점검했다.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공식화한 1일에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녹실(綠室)회의'를 열었고,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했다.

규제가 발동된 4일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도 열렸다.

정부는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을 위한 중장기 투자 계획도 내놨다.

특히 일본이 3개 핵심소재의 수출 규제에 이어 한국을 수출 심사 우대 대상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이번 사태가 자동차와 화학 등 전 산업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해당 품목이 1천여개라고 하는데 실제 조치가 이뤄졌을 때 어떤 품목이 중점이 될지, 밀접한 품목은 어떤 것인지, 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분석하고 있다"면서 "일차적으로 다음 주 중으로 정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로 영향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는 소재·부품을 품목별로 모니터링하는 한편 국산이나 다른 수입선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도 점검 중이다.

소재 분야에서는 대기업이 비용 위주의 조달 방식을 채택한 게 일본 의존도를 높인 원인이 됐다고 보고 전략적 품목의 경우 안정적인 국내 공급원 확보를 우선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여기에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육성 방안을 단기, 중·장기별로 마련해 이달말이나 다음달 초에 구체적인 대책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소재·부품 개발 사업과 관련한 인허가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 행정절차를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기로 했으며, 예산 투입에 앞서 진행되는 예비타당성조사를 생략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정부는 화학물질 생산 규제 완화와 연구개발(R&D) 분야의 주 52시간 근무제 특례 확대도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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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전' 대비…"글로벌 산업 타격" 외교전도
정부와 재계는 일본의 '몽니'가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국제사회를 상대로 외교전에도 나섰다.

정부는 아베 총리가 지난달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게 개방적인 경제는 세계 평화와 번영의 토대"라고 발언한 직후 스스로 이런 원칙을 무력화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또 7∼8일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일본 수출 규제의 문제점을 성토한 데 이어 23∼24일로 예정된 WTO 일반이사회에도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해 이번 조치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진 경제보복이라는 점을 주장할 계획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일본 경제산업성에 건의서를 보내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가능성에 대해 재고를 요청했다.

업계에서는 일본의 '횡포'가 전세계 산업에도 연쇄적인 파급 효과를 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의 발표 이후 해외 전자제품 생산업체들이 비공식적으로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들에 "실제로 생산라인 가동에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문의를 해왔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도미노 충격'을 경고했다.

실제로 주요 외신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세계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합계 점유율 70%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두 업체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전자산업은 물론 자동차, 항공, 조선, 화학 등 모든 분야가 패닉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이런 부담을 감안해 중재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