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건축은 인문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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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적 바탕 경시하는 '건축인문학' 유행
자기 건축 드러내려는 '화술'에 불과할 뿐
'건축이 인문학을 바꾼다' 생각은 못하나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자기 건축 드러내려는 '화술'에 불과할 뿐
'건축이 인문학을 바꾼다' 생각은 못하나
김광현 < 서울대 명예교수·건축학 >
인문(人文)이란 인간(人)의 무늬(紋)이고 그 무늬를 만드는 것이 건축이니, ‘건축은 인문학이다’는 주장이 서서히 속설이 됐다. 그런데 이 주장의 배경은 아주 단순하다. 건축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므로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명쾌하게 얘기하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법. 하지만 그 결과는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오류의 바탕이 됐다. 이렇게 간단하게 건축이 인문학이라고 단정될 정도라면 건축과 건축학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인문학적 건축’이란 용어가 등장하더니 ‘건축인문학’이라는 신조어도 돌아다닌다. 심지어는 ‘인문학으로 집짓기’라는 말도 생겼다. 이런 경향은 말이 말을 낳아 ‘인문의 집을 짓는 것’이 건축이며, ‘건축이란 인문학과 공학의 만남’이라는 세계 최초의 정의도 생겨났다. 대학 강좌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용을 보면 이제까지 그래왔던 건축 역사 강의인데 제목은 ‘인문학으로 보는 건축’ ‘건축의 인문학’으로 개명했다. 건축가 중에도 ‘인문 건축가’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고, 건축학자 중엔 ‘인문 건축학자’가 따로 있다. ‘인문 건축가’ ‘인문 건축학자’라고 말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다만, 인문학자가 자기 학문 안에서 건축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그것이 ‘건축인문학’일 수는 있겠다.)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라거나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라는 표현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하도 수상해 그 내용을 들여다보니 ‘인문학적 접근’이란 건축을 공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애정과 배려, 자연과 함께할 수 있게 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런 정도는 건축가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배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새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건축계라지만 허식의 도가 지나치다.
건축은 당연히 공학에 바탕을 두며 사람의 삶을 중시한다.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공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사람의 삶을 중시한다면서 ‘인문학적 접근’이라는 말을 쓴다.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는 ‘인문학적 건축’에 대한 사랑으로 건축 전문가가 스스로 건축의 공학적 바탕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진다. 무본억말(務本抑末)이란 말이 있다. 학문이 도덕철학을 앞세운 인문학에만 치중하고, 사(士)는 본(本)이고 실용적인 공(工)은 말(末)이라 여긴 조선시대의 가치관이다. 공학을 경시하는 오늘의 ‘인문학적 건축’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건축의 깊이는 이렇게 얕지 않다. 건축은 4000년 전에도 있었다. 요즘 남용되는 ‘인문학’에 얹혀 제일 득을 보고 있는 분야는 다름 아닌 건축이다. 지금 건축가가 별생각 없이 “건축은 인문학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건축을 조금 색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한 화술이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문학에 대한 모독이고 건축의 본령을 스스로 경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짜장면 인문학’도 있느냐고. 그러면 짜장면집에 가서 주방장에게 ‘인문학적 짜장면’ 한 그릇 주세요라고 해봐라”라고.
‘건축이 교육을 바꾼다’는 제목의 외국 책이 있다. 간단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제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교육학자, 교사, 교육행정 책임자는 “건축이 교육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교육이 학교 건축을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교육에는 저토록 열심이고 교육시장도 어마어마한데, 매일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건축은 언제나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건축가는 학교 건축의 현실을 보며 건축이 교육을 바꾸는 그런 건축물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이를 실제로 지어 놓아야 마땅하다.
‘인문학적 건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적 건축이라는 유행어의 속내는 건축을 인문학으로 포장해서 그 본질마저 흐리며 “인문학이 건축을 바꾼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데 있다. 인문학적 건축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과연 무엇을 발견하고 실제로 축적했는가? 아무것도 없다. 대중에게 재미있는 말로 건축을 허학(虛學)으로 만들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왜 물질과 공학에 바탕을 둔 “건축이 인문학을 바꾼다”는 생각은 못 하고 있는가?
‘인문학적 건축’이란 용어가 등장하더니 ‘건축인문학’이라는 신조어도 돌아다닌다. 심지어는 ‘인문학으로 집짓기’라는 말도 생겼다. 이런 경향은 말이 말을 낳아 ‘인문의 집을 짓는 것’이 건축이며, ‘건축이란 인문학과 공학의 만남’이라는 세계 최초의 정의도 생겨났다. 대학 강좌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용을 보면 이제까지 그래왔던 건축 역사 강의인데 제목은 ‘인문학으로 보는 건축’ ‘건축의 인문학’으로 개명했다. 건축가 중에도 ‘인문 건축가’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고, 건축학자 중엔 ‘인문 건축학자’가 따로 있다. ‘인문 건축가’ ‘인문 건축학자’라고 말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다만, 인문학자가 자기 학문 안에서 건축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그것이 ‘건축인문학’일 수는 있겠다.)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라거나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라는 표현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하도 수상해 그 내용을 들여다보니 ‘인문학적 접근’이란 건축을 공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애정과 배려, 자연과 함께할 수 있게 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런 정도는 건축가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배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새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건축계라지만 허식의 도가 지나치다.
건축은 당연히 공학에 바탕을 두며 사람의 삶을 중시한다.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공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사람의 삶을 중시한다면서 ‘인문학적 접근’이라는 말을 쓴다.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는 ‘인문학적 건축’에 대한 사랑으로 건축 전문가가 스스로 건축의 공학적 바탕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진다. 무본억말(務本抑末)이란 말이 있다. 학문이 도덕철학을 앞세운 인문학에만 치중하고, 사(士)는 본(本)이고 실용적인 공(工)은 말(末)이라 여긴 조선시대의 가치관이다. 공학을 경시하는 오늘의 ‘인문학적 건축’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건축의 깊이는 이렇게 얕지 않다. 건축은 4000년 전에도 있었다. 요즘 남용되는 ‘인문학’에 얹혀 제일 득을 보고 있는 분야는 다름 아닌 건축이다. 지금 건축가가 별생각 없이 “건축은 인문학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건축을 조금 색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한 화술이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문학에 대한 모독이고 건축의 본령을 스스로 경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짜장면 인문학’도 있느냐고. 그러면 짜장면집에 가서 주방장에게 ‘인문학적 짜장면’ 한 그릇 주세요라고 해봐라”라고.
‘건축이 교육을 바꾼다’는 제목의 외국 책이 있다. 간단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제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교육학자, 교사, 교육행정 책임자는 “건축이 교육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교육이 학교 건축을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교육에는 저토록 열심이고 교육시장도 어마어마한데, 매일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건축은 언제나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건축가는 학교 건축의 현실을 보며 건축이 교육을 바꾸는 그런 건축물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이를 실제로 지어 놓아야 마땅하다.
‘인문학적 건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적 건축이라는 유행어의 속내는 건축을 인문학으로 포장해서 그 본질마저 흐리며 “인문학이 건축을 바꾼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데 있다. 인문학적 건축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과연 무엇을 발견하고 실제로 축적했는가? 아무것도 없다. 대중에게 재미있는 말로 건축을 허학(虛學)으로 만들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그러면 우리는 왜 물질과 공학에 바탕을 둔 “건축이 인문학을 바꾼다”는 생각은 못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