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창의와 혁신은 비틀기·쪼개기·섞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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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는 뇌
데이비드 이글먼·앤서니 브란트 지음 / 엄성수 옮김
쌤앤파커스 / 368쪽 / 1만9800원
데이비드 이글먼·앤서니 브란트 지음 / 엄성수 옮김
쌤앤파커스 / 368쪽 / 1만9800원
2001년 애플이 선보인 아이팟(iPod)은 온전히 애플만의 창작품이 아니었다. 영국 발명가 케인 크레이머가 무려 22년 전에 아이디어를 내고 설계도까지 만든 휴대용 디지털 음악 재생기 IXI를 발전시킨 것이다. 해적판(무단복제 음반)이 골칫거리였던 당시, 크레이머는 음악의 형태를 디지털로 바꾸고 이를 휴대용 기계로 재생하는 방법을 고안해 설계도까지 제작했다. 하지만 상품화에는 실패했다. 당시 이용 가능한 하드웨어 메모리는 노래 한 곡을 저장할 용량에 불과했다. 세월이 지나 애플의 엔지니어들이 보다 발전된 메모리와 소프트웨어, 더 세련된 자재 등을 통합해 내놓은 게 아이팟이었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과 작곡가 앤서니 브란트는 《창조하는 뇌》에서 혁신기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전에 있던 혁신생태계를 기반으로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자동차 생산과정 전체를 한 지붕 아래로 모았던 헨리 포드의 혁신적인 조립 라인은 19세기 초 미국의 기계 발명가 엘리 휘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환 가능한 부품’으로 이뤄진 무기를 미군에 공급했던 휘트니의 아이디어가 자동차 부품 대량생산의 열쇠를 제공했다.
저자들은 그래서 모든 창의적인 것에는 나름대로 족보 또는 계보가 있다고 말한다. 과학도 예술도 마찬가지다. 미술사가 존 리처드슨이 “7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독창적 그림”이라고 극찬한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만 해도 그렇다. 유럽 미술계의 수백 년 전통인 사실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나 기하학적 형태를 도입한 것은 피카소보다 폴 세잔이 먼저였다.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 중 일부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 토착 미술품인 이베리아 반도 조각품과 전반적인 머리 구조, 귀 모양, 눈 묘사가 똑같다고 피카소는 털어놓았다. 또한 가면처럼 보이는 두 매춘부(처녀들은 매춘부였다) 중 하나의 얼굴은 피카소가 본 적 있는 아프리카 가면과 닮았다. 그림을 서 있는 누드로 구상한 건 17세기 엘 그레코의 제단화 ‘묵시록적 비전’의 영향이다.
그렇다고 피카소나 애플의 독창성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르네상스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벌이 이 꽃 저 꽃에서 약탈해도 일단 꿀을 만들면 그건 전부 벌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은 왜 끊임없이 창조하고 혁신하는 걸까. 여기서 과학자와 예술가인 두 저자의 시너지가 발휘된다. 이들은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원재료를 토대로 세상을 리모델링한다”고 설명한다. 인간 뇌의 기본 인지소프트웨어가 그렇다.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동시에 적응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일탈하는 창의성’과 경험이라는 원재료를 흡수해 조정한 다음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인지 유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는 반복과 익숙함에 둔감해지고 예측 불가한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특성을 지닌 인간의 뇌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휘기(bending), 쪼개기(breaking), 섞기(blending)의 3B다. 휘기는 기존에 있던 것의 원형을 변형하거나 뒤틀어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혁신적인 안무,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곡선 형태로 휘어진 건축물 등이 그런 사례다.
쪼개기는 하나의 원형을 해체해 조각조각 나눈 뒤 새로운 창조의 재료로 삼는 전략이다. 통신 지역을 셀(cell)로 나눠 휴대폰의 기반을 만든 것도, 하나의 화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백만 개의 미세 결정으로 이뤄진 LCD TV 기술이 쪼개기의 결과다.
섞기는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는 전략이다. 인류 문명의 비약적 발전에 기여한 합금 기술, 인간과 사자를 합친 스핑크스, 서로 다른 유전자 조직을 하나의 개체에 담는 유전공학, 과거 음악의 노랫말과 멜로디·후크·리프 등을 수정하고 섞어 새로운 노래를 만든 힙합 등이 섞기의 사례다. 닥터 드레의 1992년 히트곡 ‘렛 미 라이드(Let me Ride)’는 소울 가수 제임스 브라운의 드럼 패턴과 R&B 밴드 펄라먼트의 보컬, 힙합 래퍼 킹 티의 음향 효과를 섞어 제작한 것이다.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협력해서 가동되는 이 세 가지 전략이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는 무한하다. 무한한 변신과 재창조는 과학, 기술, 예술, 문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책에는 그런 사례들이 사진, 그림과 함께 풍부하게 실려 있다. 책 제목과 달리 복잡하고 어려운 뇌과학 이야기가 아니어서 쉽게 읽힌다. 라이몬디의 15세기 판화 ‘파리스의 심판’에서 마네의 1863년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 피카소의 1960년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이어지는 것처럼 창의성의 계보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재 주변에 있는 것들을 휘고, 쪼개고, 섞어서 내일을 위한 기초공사에 당장 나서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과 작곡가 앤서니 브란트는 《창조하는 뇌》에서 혁신기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이전에 있던 혁신생태계를 기반으로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자동차 생산과정 전체를 한 지붕 아래로 모았던 헨리 포드의 혁신적인 조립 라인은 19세기 초 미국의 기계 발명가 엘리 휘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환 가능한 부품’으로 이뤄진 무기를 미군에 공급했던 휘트니의 아이디어가 자동차 부품 대량생산의 열쇠를 제공했다.
저자들은 그래서 모든 창의적인 것에는 나름대로 족보 또는 계보가 있다고 말한다. 과학도 예술도 마찬가지다. 미술사가 존 리처드슨이 “7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독창적 그림”이라고 극찬한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만 해도 그렇다. 유럽 미술계의 수백 년 전통인 사실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나 기하학적 형태를 도입한 것은 피카소보다 폴 세잔이 먼저였다.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 중 일부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 토착 미술품인 이베리아 반도 조각품과 전반적인 머리 구조, 귀 모양, 눈 묘사가 똑같다고 피카소는 털어놓았다. 또한 가면처럼 보이는 두 매춘부(처녀들은 매춘부였다) 중 하나의 얼굴은 피카소가 본 적 있는 아프리카 가면과 닮았다. 그림을 서 있는 누드로 구상한 건 17세기 엘 그레코의 제단화 ‘묵시록적 비전’의 영향이다.
그렇다고 피카소나 애플의 독창성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르네상스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벌이 이 꽃 저 꽃에서 약탈해도 일단 꿀을 만들면 그건 전부 벌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은 왜 끊임없이 창조하고 혁신하는 걸까. 여기서 과학자와 예술가인 두 저자의 시너지가 발휘된다. 이들은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원재료를 토대로 세상을 리모델링한다”고 설명한다. 인간 뇌의 기본 인지소프트웨어가 그렇다.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동시에 적응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일탈하는 창의성’과 경험이라는 원재료를 흡수해 조정한 다음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인지 유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는 반복과 익숙함에 둔감해지고 예측 불가한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특성을 지닌 인간의 뇌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휘기(bending), 쪼개기(breaking), 섞기(blending)의 3B다. 휘기는 기존에 있던 것의 원형을 변형하거나 뒤틀어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혁신적인 안무,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곡선 형태로 휘어진 건축물 등이 그런 사례다.
쪼개기는 하나의 원형을 해체해 조각조각 나눈 뒤 새로운 창조의 재료로 삼는 전략이다. 통신 지역을 셀(cell)로 나눠 휴대폰의 기반을 만든 것도, 하나의 화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백만 개의 미세 결정으로 이뤄진 LCD TV 기술이 쪼개기의 결과다.
섞기는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는 전략이다. 인류 문명의 비약적 발전에 기여한 합금 기술, 인간과 사자를 합친 스핑크스, 서로 다른 유전자 조직을 하나의 개체에 담는 유전공학, 과거 음악의 노랫말과 멜로디·후크·리프 등을 수정하고 섞어 새로운 노래를 만든 힙합 등이 섞기의 사례다. 닥터 드레의 1992년 히트곡 ‘렛 미 라이드(Let me Ride)’는 소울 가수 제임스 브라운의 드럼 패턴과 R&B 밴드 펄라먼트의 보컬, 힙합 래퍼 킹 티의 음향 효과를 섞어 제작한 것이다.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협력해서 가동되는 이 세 가지 전략이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는 무한하다. 무한한 변신과 재창조는 과학, 기술, 예술, 문학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책에는 그런 사례들이 사진, 그림과 함께 풍부하게 실려 있다. 책 제목과 달리 복잡하고 어려운 뇌과학 이야기가 아니어서 쉽게 읽힌다. 라이몬디의 15세기 판화 ‘파리스의 심판’에서 마네의 1863년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 피카소의 1960년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이어지는 것처럼 창의성의 계보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재 주변에 있는 것들을 휘고, 쪼개고, 섞어서 내일을 위한 기초공사에 당장 나서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