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원창 중심으로 강변에 세운 고려시대 '사원도회' 강조
"산사(山寺)와 다른 강사(江寺)…흥법사지 주변 정비 이뤄져야"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세계유산 가치와 과제는
강원도 원주에는 유독 절과 절터가 많다.

강에는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가 있고, 치악산에는 궁예가 근거지로 삼은 석남사지가 있다.

원주팔경 중 구룡사, 상원사도 사찰이다.

이 가운데 법천사지(法泉寺址)와 거돈사지(居頓寺址)는 역사적·학술적 중요성이 인정돼 각각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원주시는 이 두 절터에 흥법사지(興法寺址)를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단 첫 번째 관문은 잠정목록 등재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매년 잠정목록 중 한 건을 등재 추진 대상으로 삼는다.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모두 남한강변에 있고, 절터 간 직선거리가 3㎞에 불과하다.

흥법사지는 남한강 북쪽 지류인 섬강 근처에 있으며, 법천사지에서 직선거리로 15㎞ 정도 떨어졌다.

원주시가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를 엮은 이유는 모두 고려시대에 번창했고, 강가에 조성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국사(國師) 혹은 대사(大師)가 머문 절이라는 사실도 같다.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세계유산 가치와 과제는
지난 23일 만난 박종수 원주역사박물관장은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관련해 세 사찰 배후에 흥원창(興元倉)이라는 조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충주에서 흘러온 남한강과 횡성에서 내려온 섬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흥원창은 수운(水運)의 요지였다.

박 관장은 "흥원창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운영됐는데, 조선시대에는 바람만 잘 불면 마포까지 하루에 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육로보다 수로 운송이 많았던 시기에 조창이 있다는 점은 지역 사회와 경제에 큰 도움이 됐다.

법천사, 거돈사, 흥법사는 고려시대에 흥원창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해 산에 있는 절 7개를 묶은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원주시가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세 절은 산사와는 다른 강사(江寺)라고 할 수 있다.

세계유산 전문가인 최재헌 건국대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감영에서 지방을 다스렸다면, 호족이 존재한 고려시대 초기에는 종교적 권위가 있는 사찰이 사람을 모으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며 "법천사, 거돈사, 흥법사는 수운이 발달한 강과 사찰, 도시가 결합한 형태"라고 역설했다.

박 관장은 "세 사찰은 지금 건물이 남지 않았으나, 이른바 '사원도회'(寺院都會)를 이뤘을 것"이라며 "고려시대 초기에는 사찰이 행정 중심지 기능을 했고, 사찰 주변에 도시가 형성됐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세계유산 가치와 과제는
실제로 국보 지광국사탑 이전이 확정된 법천사지는 매우 넓다.

2000년대 초반부터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과 쌍탑 터를 찾았는데, 지광국사탑 자리에서 약 390m 떨어진 전시관 부지에서도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일부 확인됐다.

거돈사지는 1990년대 초반부터 10여년간 발굴조사와 정비 작업을 진행해 폐사지(廢寺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석축(石築)과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원공국사 탑비가 있다.

박 관장은 "거돈사지 금당은 부처를 중심으로 세 칸 사이에 벽체가 있었던 것 같다"며 "불단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돌을 보면 상당히 큰 석불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거돈사지 길 건너편에는 1990년대에 폐교된 학교 건물이 있는데, 운동장에 길이가 약 7m인 당간지주 한쪽이 박혀 있다.

원주시는 건물을 보수해 작은 전시관과 편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세계유산 가치와 과제는
강원도 문화재자료인 흥법사지는 법천사지, 거돈사지와 비교하면 정비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법천사지처럼 임진왜란 무렵에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보물 제464호인 삼층석탑 주변으로 경작지가 있어서 절터임을 알기 힘들었다.

원주시는 2015년과 2016년에 금당터로 지목된 석탑 앞쪽을 발굴했으나, 직사각형이 아닌 정사각형에 가까운 건물터가 나와 금당이 아닌 목탑을 세운 장소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울러 흥법사지에는 진공대사탑비 받침과 지붕돌인 이수만 남았는데, 몸돌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외에도 흥법사지 유물로 전하는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흥법사지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제365호),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이 제자리를 떠나 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학계 관계자는 "세 절을 세계유산으로 만들려면 흥법사지 정비가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는 1990년대부터 원주 지역 시민단체들이 요구한 대로 중앙박물관에 있는 원주 유물이 돌아와야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세계유산 가치와 과제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