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중화민족 부흥' 슬로건…그 뒤엔 '몽골리안 콤플렉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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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의 중국 바로 읽기
(4) 중국인의 몽골리안 콤플렉스
中 역사 절반을 非한족이 통치
'실크로드 FTA' 구현한 몽골제국
(4) 중국인의 몽골리안 콤플렉스
中 역사 절반을 非한족이 통치
'실크로드 FTA' 구현한 몽골제국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몇 년 전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틈만 나면 내세우는 말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지만 92%가 한족이다. 그동안 이 ‘붉은 중국’은 ‘인민해방’ ‘사회주의 혁명’ 같은 공산주의 슬로건을 주로 내세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족이 절대다수인 중화민족의 부흥, 그것도 ‘위대한’이란 형용사까지 붙이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중국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의 역사를 들춰봐야 한다. 역대 왕조를 한족 왕조와 비한족(非漢族) 왕조로 이분해 보면 놀랍게도 순수한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딱 681년이다. 한나라 405년과 명나라 276년뿐이다. 나머지 기간은 모두 선비, 거란, 몽골, 여진, 돌궐 심지어는 흉노계 등 비한족이 세운 나라들이 지배했다. 쉽게 말하면 한족보다 비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이 청왕조를 무너뜨려 중화민국을 세웠고, 1949년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청왕조 300여 년을 뒤로하고 한족이 중원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런 배경에서 과거 그들을 지배하던 소수민족까지 한족이 주축이 된 중화민족에 포함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中 역사 절반은 몽골리안이 지배
북방 민족사(民族史)에서 보면 중국을 지배한 비한족은 거란, 몽골, 여진 같은 북방민족인 ‘북방 몽골리안’이다. 이들의 중국 통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국 대륙을 완전히 지배한 경우다. 몽골의 원나라가 108년(1260~1368년), 청나라가 293년(1616~1912년)간 중원을 지배했다. 인구가 수백만 명밖에 안 되는 몽골족과 만주족이 수억 명의 한족을 400여 년간 통치한 셈이다.
둘째, 한족 왕조와 비한족 왕조가 중국을 나눠 지배한 시기다. 당나라가 망한 뒤 5대 10국 시대(907~960년)도 남중국에 있던 10개국을 빼고 화북지방에 있던 후량, 후주 등 5개 왕조가 순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였다. 960년 한족이 송나라를 세웠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북송시대(960~1127년), 지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화북지방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907~1125년)가 차지하고 있었다. 남송(1127~1279년)도 여진이 세운 금나라(1115~1234년)에 1127년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당하고 남쪽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쫓겨 갔다. 중국인이 한족 왕조라고 말하는 수나라(581~619년)도 선비족의 탁발부 출신인 양견(수 문제)이 세운 나라고, 당나라(618~907년)도 순수한 한족 왕조가 아니라 탁발 선비 계통의 왕조다.(양하이잉, <반중국의 역사>, 2016)
몽골리안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족 왕조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한나라가 역사상 최초의 한족 왕조다. 우리와 인종이 다른 지나족(支那族)에 뿌리를 둔 ‘한족’이란 개념도 이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고조 유방은 오랑캐 흉노를 깔보고 친정(親征)했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거짓 후퇴하는 흉노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어 백등산에서 선우묵돌 왕의 대군에 포위당했다가 흉노왕의 여인에게 후한 선물을 주고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그 후 한나라는 공주를 흉노에 시집보내고 매년 비단, 곡물도 바쳐야 했다. 중국 역사는 이를 두고 한나라가 오랑캐 흉노에 하사(下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흉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했는지도 모른다.
군사력이 약한 북송도 1004년 요나라와 ‘단연의 맹서’를 맺고,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銀) 10만 냥을 바쳤다. 남송 또한 금나라에 세공(歲貢)을 하며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1279년 몽골의 대칸인 쿠빌라이 칸에게 멸망한다.
한자문명에 의해 왜곡된 몽골리안 세계
역사의 피해자가 승자의 역사를 기술한다면 당연히 짓밟힌 분노가 붓끝에 담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거의 모든 흉노, 거란, 돌궐, 위구르의 역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 등과 같이 한자로 쓰였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원사(元史)’인데 이건 피해자인 한족의 나라, 명나라가 쓴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한자로 쓰인 북방 몽골리안의 역사는 상당 부분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북방민족은 활이나 쏘며 약탈하는 그런 야만인이 아니었다. 서양에서조차 잔인한 약탈자, 파괴자로 묘사되는 몽골제국을 한번 재조명해보자. 몽골제국에 대한 역사는 한자 말고도 세계 20여 개 국어로 쓰여 있다. 아브라함 도손의 ‘몽골사(Histoire des Mongols)’ 같은 서양 사료(史料)와 함께 ‘몽골비사’, ‘집사(集史)’ 등 몽골 쪽에서 쓴 역사가 남아 있다. 의외로 몽골제국의 경영에 참여한 무슬림 상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쓴 역서도 많아 이를 통해 몽골제국의 진면목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실크로드 FTA’ 구현한 ‘팍스 - 몽골리카’
몽골 기마군단은 정복 과정에서 약탈과 파괴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일단 제국을 건설하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창한 글로벌 통상대국을 만들었다. 당나라 장안(지금의 시안)의 비단이 실크로드를 지나 유럽에 도착하면 가격이 무려 100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낙타 등에 비단을 싣고 먼 길을 가려면 비용과 리스크도 문제지만, 수많은 왕국을 지나야 하고 그때마다 통행세 등 온갖 구실로 뜯기고 또 뜯겼을 것이다.
그런데 몽골제국은 이런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줬다. 제국 내 무역에서 모든 국경 통행세(관세)를 철폐하고, 대신 최종 목적지에서 물건을 팔 때 판매가격의 30분의 1을 상품세로 받았다.(스기야마 마사아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2011) 오늘날로 말하면 실크로드에 있던 수많은 나라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셈이다. 그러니 자연히 동서 간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제국은 번성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이 지금의 바그다드에 있던 호라즘 제국을 정벌하러 나섰을 당시 그곳은 몽골군이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그때 길을 안내한 것이 실크로드를 오가던 페르시아와 위구르 상인들이었다. 어찌 보면 몽골제국은 몽골 기마군단과 페르시아-위구르 상인이 합작한 군상(軍商) 복합 글로벌 비즈니스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신분과 혈연으로 뒤얽힌 농경민족과 달리 몽골제국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인종, 지위, 종교를 불문하고 원한다면 외부인을 ‘몽골집단(Mongol Ullus)’으로 받아줬다. 물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천인장(千人長), 만인장(萬人長)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에 머물며 세금징수관을 했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카라코룸에는 불교, 라마교, 이슬람교에서부터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까지 있었다고 한다.
‘소중화’에서 ‘북방 몽골리안’으로
과거 우리는 한족 왕조인 한(漢), 송(宋), 명(明)나라만 숭상했다. 우리를 ‘작은 중국’,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칭하며 북방민족을 오랑캐라고 깔보고 그들이 세운 원(元), 청나라엔 진심으로 복속하지 않았다. 병자호란도 따지고 보면 친명배청(親明排淸) 사상에서 신흥왕조 청을 무시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따르다가 자초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중국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란 뜻의 동이(東夷), 명나라는 좀 봐줘서 조선을 순이(順夷), 즉 ‘말을 잘 듣는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건 확실히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모화(慕華)사상에 빠져 우리의 정체성을 소중화에 두고 두 나라 역사를 양자관계로 보면 ‘중화제국-속국’ 같은 상하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패권국가로 부활하는 중화제국의 그늘로 다시 들어간다.
잘못된 소중화에서 벗어나 우리의 정체성을 혈연적, 언어적으로 우리 민족의 주류와 가까운 몽골, 여진, 튀르크 같은 북방 몽골리안에서 찾아보자.(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2014) 그러면 역사적 한·중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어 그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역사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족의 DNA에는 바람과 같이 말 달리며 그들을 지배하던 북방 몽골리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든 개인이든 콤플렉스가 있으면 뭔가 허세를 부리고 유난을 떤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들어 요란스러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너그럽게 이해해주면 된다.
한때 중원을 지배하던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일부가 외몽골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화제국에 한화(漢化)되지 않고 세계 10위권의 ‘미들 파워’로서 건재하는 북방 몽골리안의 나라는 딱 한 나라, 한반도의 대한민국뿐이다.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몇 년 전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틈만 나면 내세우는 말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지만 92%가 한족이다. 그동안 이 ‘붉은 중국’은 ‘인민해방’ ‘사회주의 혁명’ 같은 공산주의 슬로건을 주로 내세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족이 절대다수인 중화민족의 부흥, 그것도 ‘위대한’이란 형용사까지 붙이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중국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의 역사를 들춰봐야 한다. 역대 왕조를 한족 왕조와 비한족(非漢族) 왕조로 이분해 보면 놀랍게도 순수한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딱 681년이다. 한나라 405년과 명나라 276년뿐이다. 나머지 기간은 모두 선비, 거란, 몽골, 여진, 돌궐 심지어는 흉노계 등 비한족이 세운 나라들이 지배했다. 쉽게 말하면 한족보다 비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이 청왕조를 무너뜨려 중화민국을 세웠고, 1949년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청왕조 300여 년을 뒤로하고 한족이 중원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런 배경에서 과거 그들을 지배하던 소수민족까지 한족이 주축이 된 중화민족에 포함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中 역사 절반은 몽골리안이 지배
북방 민족사(民族史)에서 보면 중국을 지배한 비한족은 거란, 몽골, 여진 같은 북방민족인 ‘북방 몽골리안’이다. 이들의 중국 통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국 대륙을 완전히 지배한 경우다. 몽골의 원나라가 108년(1260~1368년), 청나라가 293년(1616~1912년)간 중원을 지배했다. 인구가 수백만 명밖에 안 되는 몽골족과 만주족이 수억 명의 한족을 400여 년간 통치한 셈이다.
둘째, 한족 왕조와 비한족 왕조가 중국을 나눠 지배한 시기다. 당나라가 망한 뒤 5대 10국 시대(907~960년)도 남중국에 있던 10개국을 빼고 화북지방에 있던 후량, 후주 등 5개 왕조가 순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였다. 960년 한족이 송나라를 세웠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북송시대(960~1127년), 지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화북지방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907~1125년)가 차지하고 있었다. 남송(1127~1279년)도 여진이 세운 금나라(1115~1234년)에 1127년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당하고 남쪽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쫓겨 갔다. 중국인이 한족 왕조라고 말하는 수나라(581~619년)도 선비족의 탁발부 출신인 양견(수 문제)이 세운 나라고, 당나라(618~907년)도 순수한 한족 왕조가 아니라 탁발 선비 계통의 왕조다.(양하이잉, <반중국의 역사>, 2016)
몽골리안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족 왕조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한나라가 역사상 최초의 한족 왕조다. 우리와 인종이 다른 지나족(支那族)에 뿌리를 둔 ‘한족’이란 개념도 이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고조 유방은 오랑캐 흉노를 깔보고 친정(親征)했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거짓 후퇴하는 흉노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어 백등산에서 선우묵돌 왕의 대군에 포위당했다가 흉노왕의 여인에게 후한 선물을 주고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그 후 한나라는 공주를 흉노에 시집보내고 매년 비단, 곡물도 바쳐야 했다. 중국 역사는 이를 두고 한나라가 오랑캐 흉노에 하사(下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흉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했는지도 모른다.
군사력이 약한 북송도 1004년 요나라와 ‘단연의 맹서’를 맺고,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銀) 10만 냥을 바쳤다. 남송 또한 금나라에 세공(歲貢)을 하며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1279년 몽골의 대칸인 쿠빌라이 칸에게 멸망한다.
한자문명에 의해 왜곡된 몽골리안 세계
역사의 피해자가 승자의 역사를 기술한다면 당연히 짓밟힌 분노가 붓끝에 담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거의 모든 흉노, 거란, 돌궐, 위구르의 역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 등과 같이 한자로 쓰였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원사(元史)’인데 이건 피해자인 한족의 나라, 명나라가 쓴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한자로 쓰인 북방 몽골리안의 역사는 상당 부분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북방민족은 활이나 쏘며 약탈하는 그런 야만인이 아니었다. 서양에서조차 잔인한 약탈자, 파괴자로 묘사되는 몽골제국을 한번 재조명해보자. 몽골제국에 대한 역사는 한자 말고도 세계 20여 개 국어로 쓰여 있다. 아브라함 도손의 ‘몽골사(Histoire des Mongols)’ 같은 서양 사료(史料)와 함께 ‘몽골비사’, ‘집사(集史)’ 등 몽골 쪽에서 쓴 역사가 남아 있다. 의외로 몽골제국의 경영에 참여한 무슬림 상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쓴 역서도 많아 이를 통해 몽골제국의 진면목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실크로드 FTA’ 구현한 ‘팍스 - 몽골리카’
몽골 기마군단은 정복 과정에서 약탈과 파괴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일단 제국을 건설하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창한 글로벌 통상대국을 만들었다. 당나라 장안(지금의 시안)의 비단이 실크로드를 지나 유럽에 도착하면 가격이 무려 100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낙타 등에 비단을 싣고 먼 길을 가려면 비용과 리스크도 문제지만, 수많은 왕국을 지나야 하고 그때마다 통행세 등 온갖 구실로 뜯기고 또 뜯겼을 것이다.
그런데 몽골제국은 이런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줬다. 제국 내 무역에서 모든 국경 통행세(관세)를 철폐하고, 대신 최종 목적지에서 물건을 팔 때 판매가격의 30분의 1을 상품세로 받았다.(스기야마 마사아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2011) 오늘날로 말하면 실크로드에 있던 수많은 나라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셈이다. 그러니 자연히 동서 간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제국은 번성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이 지금의 바그다드에 있던 호라즘 제국을 정벌하러 나섰을 당시 그곳은 몽골군이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그때 길을 안내한 것이 실크로드를 오가던 페르시아와 위구르 상인들이었다. 어찌 보면 몽골제국은 몽골 기마군단과 페르시아-위구르 상인이 합작한 군상(軍商) 복합 글로벌 비즈니스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신분과 혈연으로 뒤얽힌 농경민족과 달리 몽골제국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인종, 지위, 종교를 불문하고 원한다면 외부인을 ‘몽골집단(Mongol Ullus)’으로 받아줬다. 물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천인장(千人長), 만인장(萬人長)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에 머물며 세금징수관을 했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카라코룸에는 불교, 라마교, 이슬람교에서부터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까지 있었다고 한다.
‘소중화’에서 ‘북방 몽골리안’으로
과거 우리는 한족 왕조인 한(漢), 송(宋), 명(明)나라만 숭상했다. 우리를 ‘작은 중국’,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칭하며 북방민족을 오랑캐라고 깔보고 그들이 세운 원(元), 청나라엔 진심으로 복속하지 않았다. 병자호란도 따지고 보면 친명배청(親明排淸) 사상에서 신흥왕조 청을 무시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따르다가 자초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중국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란 뜻의 동이(東夷), 명나라는 좀 봐줘서 조선을 순이(順夷), 즉 ‘말을 잘 듣는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건 확실히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모화(慕華)사상에 빠져 우리의 정체성을 소중화에 두고 두 나라 역사를 양자관계로 보면 ‘중화제국-속국’ 같은 상하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패권국가로 부활하는 중화제국의 그늘로 다시 들어간다.
잘못된 소중화에서 벗어나 우리의 정체성을 혈연적, 언어적으로 우리 민족의 주류와 가까운 몽골, 여진, 튀르크 같은 북방 몽골리안에서 찾아보자.(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2014) 그러면 역사적 한·중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어 그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역사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족의 DNA에는 바람과 같이 말 달리며 그들을 지배하던 북방 몽골리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든 개인이든 콤플렉스가 있으면 뭔가 허세를 부리고 유난을 떤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들어 요란스러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너그럽게 이해해주면 된다.
한때 중원을 지배하던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일부가 외몽골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화제국에 한화(漢化)되지 않고 세계 10위권의 ‘미들 파워’로서 건재하는 북방 몽골리안의 나라는 딱 한 나라, 한반도의 대한민국뿐이다.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