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이 휘슬을 너무 자주 불면 선수들이 기량을 100% 보여줄 수 있을까요?”

한 대기업 A사장은 7일 정부, 기업, 국민의 관계를 각각 심판, 선수, 관중에 비유했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선수(국내 기업)들은 어떻게든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려 하는데 심판(정부)이 자꾸 휘슬을 불고 경기 흐름을 끊으면 관중(국민)이 무슨 재미로 경기를 보겠느냐는 얘기다. A사장은 “심판의 역할은 원활한 경기 진행으로 선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며 “요즘 심판은 국가대표를 불러모아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만 관심을 두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한·일 경제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기업 역할론’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이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국익을 지키고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도 수시로 기업인을 불러 소재·부품 국산화 방안 등의 대책 마련을 주문하고 있다.

대기업 역시 ‘소재·부품 산업 생태계 조성’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주저하고 있다.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 영향이 크다. ‘선의’로 한 행동이 역풍을 맞거나 정부의 규제 대상이 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여권과 정부 일각에서는 ‘소재산업의 경쟁력이 낮은 원인이 대기업에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조달처 다변화에 소홀했다는 지적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대기업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은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유독 대기업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사회 풍토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는 기업인도 적지 않다. 그룹 내 완제품·소재 계열사 간 정당한 내부거래를 놓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만 않았더라도 국내 소재산업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졌을 것이란 지적이다. 한 경제단체 고위관계자는 “삼성전자가 국내에서 10만 명을 고용하고 한 해 11조원 넘는 법인세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한국 사회가 대기업의 공(功)은 인정하지 않고 과(過)만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학계에선 한·일 경제전쟁을 계기로 국내 기업인의 기업가정신을 북돋아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원로 교수는 “‘기업천하지대본(企業天下之大本)’이란 인식을 하고 기업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한국 대기업이 강해져야 일본의 경제보복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정수/고재연 기자 hjs@hankyung.com